080924 Tibet 3 <라싸 포탈라궁, 조캉사원>
포탈라궁(布达拉宮 Potala Palace)
포탈라는 티벳어로 `깨끗한 땅`, 즉 성지라는 뜻이다
또한 티벳인에게 포탈라궁은 `관세음보살이 사는 곳`으로 그들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믿는 달라이 라마의 거처를 뜻한다
실제로 현재의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생활했던 겨울 궁전이다
포탈라궁 둘레를 따라 코라를 도는 티벳인
티벳인은 사원, 불탑, 성지 등의 둘레을 따라 돌며 마니차를 돌리거나 불경을 외는 코라를 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티벳인에게 있어 삶 자체가 종교이고 종교가 삶인 생활이다
오체투지를 하며 코라를 도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오체투지는 불교 신자가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불·법·승 삼보(三寶)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방법으로
양쪽 무릎,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는 예법으로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의미이다
티벳의 서부나 동부의 먼 곳에서 이곳 라싸로 성지순례를 오면서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절을 하며
오체투지로 오는데 적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걸리지만 이들에게는 일생의 최대 염원이다
밤이 되면 간 곳까지 표시를 해두고 다음 날 일찍 다시 그 자리에서 시작하고,
농사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농사가 끝나면 표시한 곳에서부터 다시 순례를 시작하는데
자갈길, 개울, 눈길을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산과 언덕을 넘어 성지에 이른다
더러는 순례길에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이들의 신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 지 티벳인이 아니고서 이방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티벳인의 나라이기에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달라이 라마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티벳이란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니차는 코라를 돌며 손에 들 수 있는 것에서부터 그 크기가 다양하다
마니차 속에는 경전이 들어있어 시계방향으로 한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어려운 티벳 문자를 읽지 못하는 대부분의 티벳인을 위한 것으로 생활 속에 종교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티벳인은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 반메 훔`을 암송한다
마니차를 돌리는 티벳인
마니차를 돌리는 방향은 반드시 시계방향이다
포탈라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으로 철근이나 시멘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13층 115 m의 높이로 지어졌다
홍궁과 백궁으로 나뉘고 백궁은 속(俗)을, 홍궁은 성(聖)을 상징하는 바 하층부는 백궁이고 상층부는 홍궁이다
따라서 역대 달라이 라마는 정치, 행정 업무는 백궁에서, 종교 행사는 홍궁에서 주재했다
현재 관광객에 공개된 부분은 홍궁인데 내부 촬영은 역시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일찌기 티벳을 최초로 통일한 송첸 감포가 당나라의 문성공주와 네팔의 브리쿠니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637년 최초로 이곳에 궁을 세웠지만 그 흔적은 몽골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몽골을 티벳에서 내쫓고 송첸 감포 시대의 영토를 다시 회복한 5대 달라이 라마 로장 걋소(1617~1682) 때
이르러 다시 지어졌다
1966년 문화혁명 때 홍위병이 티벳 불교의 상징인 포탈라궁을 파괴하려 했으나 주은래가 군대까지 파견해 가며
파괴를 막아 현재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포탈라궁은 홍산(Red Mountain)의 경사면에 세워졌는데
동서 길이 400m, 남북 길이 350m, 높이 117m,
벽 두께는 하부 5m, 상부 3m,
13층 건물 내부의 방은 총 1,000개,
10만 여점의 불상, 불화 등의 유장물이 보존되어 있다
포탈라궁의 고도가 3,750m인데 고도 적응을 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던 탓에
계단이나 오르막 경사길을 이동할 때마다 쌕쌕거리게 되는데 사진을 찍으려 잠시 호흡을 멈출 때마다
숨이 차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야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처음 접하는 광경에 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지곤 했다
라싸에 도착한 이후 가끔 들여다 보게 되는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에는 저산소증을 여실히 반영하듯
입술이 평소의 붉은 빛을 잃고 푸르죽죽한 푸른 색으로 변해있었다
라싸에 도착하기 전부터 미리 고소증 예방약으로 알려진 디아목스(Diamox)를 복용하고 있었다
디아목스의 효능을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란 생각에 먹어봤는데 역시 효과는 별로인 것 같았다
물론 전날 복통으로 밤새 앓으며 전신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고소증이 더 악화된 게 디아목스의 효능을 상쇄해버렸을 수는 있다
까다로운 식성, 위장장애, 고소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식욕은 더 떨어지고 낮은 기압탓에 먹지 않아도
배는 한정없이 더부룩하기만 하니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의 일정이 라싸보다 고도가 훨씬 더 높은 5천 미터 이상까지 이동해야하는데 잘 버텨낼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티벳을 떠나지 않는 한 뾰족한 수가 없으니 `깡`으로 버텨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2000년 조캉사원, 2001년 노블링카도 함께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일일 방문객 수는 보존을 위해 제한되고 있다
과거 1,600명이었는데 청장열차 개통 이후 늘어난 관광객에 맞춰 2,300명으로 늘어났지만
이 마저도 오전에 끝나버리곤 한다
티벳의 환생제도와 달라이 라마의 유래에 대해 간략하면...
타쉬룬포사원의 창립자였던 겐덴 드롭이 죽기 전 자신이 환생할 것을 알렸고
그의 환생으로 알려진 겐덴 가쵸가 드레풍사원의 종정이 되었다
1578년 겐덴 가쵸의 뒤를 이은 겔룩파의 3대 수장 소남 가쵸(1543~1588)가 몽골의 지배자인 알탄 칸의 초청을 받고
청해 지방에 갔을 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름 뒷부분 `가쵸`에 해당하는 몽골어가 `달라이`로서 `바다`를, `라마`는 티벳어로 `스승`을 뜻한다
즉 달라이 라마는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뜻이다
이때부터 티벳에서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으며, 소남 가쵸의 전생인 겐덴 드롭과 겐덴 가쵸를
제1, 2대 달라이 라마로 칭하고 소남 가쵸는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제5대 달라이 라마에 이르러 티벳은 동부 캄 지역에서 서부 카일라스 지역에 이르기까지 달라이 라마를
국가원수로 하는 달라이 라마 정권이 확립되었다
<참고 사진>
포탈라궁 내부,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가쵸(1935년 7월 6일~)가 1959년 인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기거했던 방에
남겨진 금빛 가사만이 그가 이곳의 주인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포탈라궁 내부의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총 8좌의 달라이 라마의 영탑 중에 5대 달라이 라마의 영탑은 금 11만 냥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보석으로 장식되었는데
티벳인은 이 영탑이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짱무예싱(藏目葉下)` 라고 할 정도이다
가장 검소한 민족이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은 이율배반은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달라이 라마가 단순한 정치적 왕이 아니라 부처의 환생으로 믿어지는 티벳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인간에게 종교적 열정만큼 불가사의한 심연도 없는 것이다
포탈라궁에서 내려본 라싸 시가지
티벳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맑다
혹자는 푸른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하다고 말하지만 물감으로도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그런 푸르름이다
티벳은 지구상 최대, 최고의 고원인 티벳고원 위에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4,0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다
굳이 지구상에 3극이 있다면 남극, 북극과 티벳 이다
티벳인은 평생 세 번 목욕을 한다고 한다
태어날 때, 결혼할 때, 죽어서 이다
공기가 건조해서인지 곁에 가까이 가도 짠내, 찌른내, 꾸린내 같은 고약한 냄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조캉사원(大昭寺 Jokhang Monastery)
라싸 구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티벳인이 가장 신성시 하는 사원이며 최고의 성지이다
639년 창건된 티벳 최초의 목조건축으로 지금까지 1,37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4층 건물로 면적은 25,100㎡ 이고 건물 양식은 당나라, 인도, 네팔의 영향을 받았다
티벳을 통일하고 세력을 떨쳤던 송첸 감포와 그의 부인인 당나라의 문성공주, 네팔의 브리쿠티 공주의 상이 모셔져 있다
조캉이란 티벳어로 석가모니상이 모셔진 불당이란 의미인데 본전에는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시집올 때
가져온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조캉사원 건립에 관한 전설에
632년에 네팔의 브리쿠티 공주가 손첸감포와 정략 결혼했는데 문성 공주가 당나라에서 시집오기 8년 전이었다
송첸감포는 브리쿠티 공주를 위해서 639년부터 647년까지 총 9년에 걸쳐 조캉 사원을 지었다
이때 송첸감포는 반지를 던져 반지가 떨어지는 곳에 사원을 짓겠다고 했는데 반지는 공교롭게도 호수 안으로 떨어졌다
호수를 막아 사원을 짓기 시작했으나 사원은 짓기가 무섭게 무너져 내렸다
라싸는 마녀인 나찰녀가 엎드려 있는 형국인데 마녀의 심장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조캉 사원이 세워진 자리인 와탕 호수였다
사원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마녀의 요기를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수천 마리의 양떼를 동원해서 산에서 흙을 날라다가 호수를 메웠다
647년 창건 이후 5대 달라이 라마 때 크게 확장되었고
1966년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후 방치되었다가 1972년부터 1980년 사이 다시 복구되었다
포탈라궁과 함께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시 내부촬영은 철저히 막혀 있다
비싼 입장료 내고 들어왔는데 가는 곳마다 이렇게 사진촬영은 안 된다고 하니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한다
원~ 더러워 안찍는다 !
내부의 벽면과 회랑 벽면에는 역사적 인물과 불교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묘사한 티벳 양식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근 1400여 년동안 채워진 유장품은 그 수에서도 물론이거니와 화려함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사원 내부는 성수기가 아님에도 미어터질 듯 가득찬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처처이 불을 밝힌 야크버터 향은 그 타는 냄새와 그을음으로 나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의 금의 태반은 티벳에서 사용된 것 같다
수많은 불상을 비롯하여 내부 장식품과 사원의 지붕 등 죄다 금칠이다
야크버터 향,
도대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버터 향이 타고 있어 사원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매캐한 냄새가 가득하다
티벳인이 가장 많이 바치는 공양물 두 가지는 돈과 야크버터인 것 같았다
아무리 찌들게 가난해 보여도 티벳인은 불전에 바치는 돈에 관해서는 아주 관대해 보였는데
이는 티벳 라마불교의 사상과 관련된 것 같다
부처님을 열심히 믿으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티벳 사원에는 죽음의 세계와 관련된 지장보살을 볼 수 없다
포탈라궁과 마찬가지로 사원 분위기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오성홍기,
티벳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을 티벳인에게 세뇌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웨딩 촬영
바코르 광장(八廓街 Barkhor Street)
티벳인이 최고성지로 여기는 조캉사원을 중심으로 열려 있는 성스러운 공간이자 시장이기도 하다
티벳 라싸에서 가장 오래된 구도심으로 각 지역에서 순례를 온 티벳인과 외국 여행객으로 북적거리며
많은 가게와 상점들이 즐비하다
앞서가는 티벳인의 흐름을 따라 걷다보면 자연스레 시계방향으로 돌게 되는데
이는 티벳인이 사원이나 탑의 코라를 돌거나, 마니차를 돌릴 때 등 항시 시계방향이기 때문이다
만약 반시계방향으로 돈다면 이들은 티벳 뵌교도이다
수많은 티벳인이 바코르 광장을 따라 조캉사원 순례의 코라를 돌고 있다
이 코라를 위해 수 개월, 수 년에 걸쳐 성스러운 이곳에 도착한 사람도 있다
순례의 길이 고통스러울수록 죄가 정화된다고 믿어 고통보다는 법열을 느낀다
티벳인처럼 최소한의 소유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민족도 없을 것인데 이런 엄청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 들다니
이들이 느끼고 있는 죄의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같이 죄 많고 욕심 많은 인간에게는 상상조차 미치지 않는 영역인 것 같다
엄청난 체력소모를 요하는 오체투지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마지않는 것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일진대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면서 염세로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부자 나라와 비교하면 이는 여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다
세라사원(色拉寺 Sera Monastery)
라싸의 중심지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세라는 티벳어로 싸락눈이란 뜻으로 세라사원을 짓는 동안 계속 싸락눈이 내렸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하고
신기슭에 들장미가 만발하여 꽃이름을 따서 세라라고 칭했다고도 한다
1419년 황모파(겔룩파) 창시자인 총카파의 제자, 사캬 예쉐(Sakya Yeshe)에 의해 창건되었다
600년의 역사를 가진 세라사원은 드레풍사원, 간덴사원과 함께 겔룩파 3대 불교대학으로
역대 달라이 라마들도 이곳에서 수학하고 ‘거쉐’라는 학위를 받았다
학생이 최고로 많았을 때는 7천여 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있는데
문화 혁명 때 사원 파괴와 승려 박해가 행해지면서 현저히 감소했다
1959년 중국에 대항하던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할 때 가장 많은 승려들이 따라 나선 곳이 바로 세라 사원이었다
이 사원의 큰 볼거리는 매일 오후 15시에 열리는 승려들의 교리문답 토론인 ‘최라(Chora)’이다
세라 사원 앞마당 정원에 승려들이 모여 앉아 보통 일대일로 토론을 한다
발표자는 `무드라(Mudra 手印)라는 동작인 손바닥을 내리쳐 가면서 주장을 펼치고 질문을 하면
상대가 바로 대답을 하는 것으로 토론이 진행되며 즉시 대답하지 못하면 탈락한다
마치 서로 싸우는 사람처럼 얼굴이 상기되고 삿대질을 하기도 하는데 인도에서 전해진 토론 방식이다
밤 12시가 가까운 시각, 잠을 들이려 누웠으나 평소처럼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귀에서는 맥박음이 쾅쾅거려 이러다 뇌혈관이라도 곧장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산소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심장이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느라 빨리 박동하기 때문인 것이다
잠이 드는 순간까지 고소증을 인식해야만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