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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4~0202 중동 2 <중동의 붉은 꽃, 요르단>

서영도 2020. 2. 8. 11:52



전날 저녁 오만의 무스캇을 떠나 밤 12시 30분 경 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에 도착해 에티하드항공이 제공하는

환승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월 27일 10시 30분 비행기로 3시간  거리의 요르단 암만으로 향한다

3시간 비행일망정 비행경로가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것인데 옆자리에 앉은 요르단 청년이 내가 오만에서 착용했던 옷 상태를 보고는

" 암만은 지금 추운 시기여서 그렇게 입으면 안돼요 " 라고 한다

암만공항에 도착해 트렁크를 찾자마자 점퍼부터 꺼내 껴입고 요르단 일정을 시작한다

이번 여행의 주목적이 페트라를 구경하는 것이었던 만큼 4시간 반 정도 거리의 남쪽 페트라로 향한다 

차량 이동 도중 휴식도 취할 겸 모세 기념교회에 잠깐 들린다





모세 기념교회(Memorial of Moses)


느보산(710 m) 정상(Syagha)에 세워진 교회이다

모세의 죽음을 기려 최초 4세기에 세웠던 교회당 터에  597년 비잔틴 시대 때 세운 교회 흔적이 1933년 이곳에서 발견되었고

이후 복원을 거쳐 현재 공개되고 있는데 당시의 비잔틴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이곳은 물론 크리스천의 성지 순례 지역이다

이번 여행 중 요르단이 성경과 관련된 곳이 꽤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크리스천이 아니다 보니 성경에 대해 일자무식이어서 관련 인물과 내용 등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혹시 잘못 언급된 부분들이 있어 나의 무지를 일깨워준다면 감사하겠다 .......




느보산 정상에서  이스라엘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이날따라 날씨가 뿌엿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맑은 날이면 사해, 요단강, 여리고, 가나안 등 이스라엘 땅이 잘 보인다

바로 앞쪽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잠간 머물렀던 모압평원이다


BC1460년 모세는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난다

출애급 이후 약 40년 동안 시나이반도 일대에서 광야생활을 하다 1420년경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모세는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이곳 느보산(Mount Nebo)에서 죽는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는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모세 기념교회




교회가 처음 세워졌던 4세기 경에는 이곳의 기후가 지금과는 판연히 달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사자, 호랑이, 멧돼지, 얼룩말 등이 그려져 있으니....





 

구리놋뱀(Brazen Serpent)

민수기 21장에

아랏왕을 이기고 바로 헤브론으로 올라가려던 백성들에게 남쪽 광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응답에 화가 나서 불평하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 이들을 징계하는데 큰 재앙을 만난 백성들은 회개하며 모세에게 도움을 구한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고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조각가 지안 파올로 판토니가 모세의 구리놋뱀과  예수가 못 박혀 사망한 십자가를 조합해 만든 조형물이다





와디무싸(Wadi Musa)


페트라의 와디무싸에 도착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한 다음 `페트라 나이트`를 관람하러 나선다



페트라 나이트(Petra Night)


매주 월, 수, 목요일에 공연이 열리는데 저녁 8시 30분부터 입장이 가능하다

방문자센터에서부터  통로 양쪽으로 밝혀진 1500여개의 촛불이 바람에 일렁이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촛불을 밝혔다고 하지만 협곡의 양옆은 높이 100 m에 이르는 바위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너무 어둡다

300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이 어떠할지 짐작조차 어려워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내일 아침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 나바테아인이 건설했던 고대 도시 페트라의 신비는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쉽게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은 단지 페트라의 존재 자체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한 사십 여분 걸었을까

금새 쏟아져내릴 것만 같이 가파르고 위압적으로만 느껴지던 협곡 양쪽 절벽이 어느 순간 갑자기 물러나고

확 트이는 공간에 이르자 수백개의 촛불이 점점이 박혀있다

조명빛을 받아 붉고 푸르게 물든 알카즈네에 마침내 이른 것이다






공연좌석은 따로 없다

현장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일정하게 줄을 맞춰 그저 땅바닥에 주저앉으면 된다

공연은 베두인 전통 음악인 류트 선율이 정적의 어둠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내일 만나게 될 페트라에 대한 신비감이 한층 고조되는 기분이다.......



와디무사의 호텔



페트라(Petra)


기원 전 7세기부터 2세기까지 아랍, 아프리카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무역업에 종사하던 나바테아인이

이곳에 정착하며 건설한 산악도시이다

페트라의 의미는 그리스어 `바위`란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시는 붉은 사암의 골짜기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건설되었다

1845년 영국의 시인 윌리엄 버건은 페트라를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같은 붉은 도시(A rose-red city half as old as time)`라고 표현했다


신전, 극장, 무덤 등 다양한 시설이 잘 갖추어져 크게 번성했던 페트라는 로마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교역로의 발달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12세기 이슬람이 들어온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1812년 스위스의 탐험가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트에 의해 발견되며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흔히 `700년 동안 잃어버린 장미빛 도시`라고도 한다

요르단의 국보 1호이고 198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페트라 방문자센터


페트라 !

오래 전부터 요르단 페트라를 한번 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서....


최초 그리스어로 쓰였던 성경의 마태복음 16장 16절,

예수가 시몬을 페트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페트라는 암반 또는암석의 의미이다

그리스어 페트라가 그후 라틴어로 페트로스, 영어로 피터, 한국어로 베드로가 된다



요르단 50 디나르면 8만5천 원이다

전세계적으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요르단 재정 수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에는 왜  2천년 전쯤에 만들어진 이런 문화재가 없는 건지

참 배 아프다

하기야 작금에도 싸우기만 하고 곳간 털어먹기 바빠 정신없는데.....



일정은 방문자센터에서 알데히르 수도원까지 도보로  왕복 약 11 km의 거리이다

17시에 문을 닫기에 그전에 최대한 둘러보는 일정을 소화하려 한다




엊저녁에는 너무 어두워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는데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방문자센터를 통과하는 순간 분위기가 급반전한다

현대에서 고대로 무려 3000년을 거슬러 순간이동 하듯 하니 다소 얼떨떨한 기분마저 든다

마침내 페트라의 입구인 시크(Siq)에 이른 것이다

고도계를 보니 1000 m가 넘는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 왕국의 수도이자 아라비아 대상 교역로의 요충지였다

오만, 시리아, 인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향유, 향신료, 직물, 사해 소금 등을 싣고온 아라비아 대상들은 이 관문을 통해

서쪽 가자, 이집트, 북쪽 시리아  다마스크스, 지중해를 거쳐 유럽, 사막을 넘어 페르시아만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고

이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나바테아인은 통행세를 거둬들였고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이집트, 그리스, 로마 제국의 부흥은 향유 frankincense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는데

향유는 신전, 장례의식, 방부처리, 의례 등에 필수적이었기에 이의 교역로를 장악한  페트라가 번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시크(Siq)

협곡의 통로길로 입구에서 알카즈네까지 구불구불하게 약 1.25 km 이어진다

폭 3 ~ 4 m로 양쪽 벽의 높이는 91~182 m이다

BC 3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군사를 보내 페트라를 정복하려했지만 실패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지형적 조건은 페트라의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점이었다


시크는 생긴 모습이 미국 남서부의 앤텔로프 캐년에서 보았던 모습이랑 너무 흡사한데

그 생성원인도 지질학적으로 닮아 단층이 생긴 후 물의 침식작용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이런 slot 캐년의 문제점은 단시간에 많은 비가 쏟아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앤텔로프 캐년에서도 과거 이곳의 사진을 찍어러 들어갔던 사진사들이 꽤 떨어진 곳에 내린 소나기인데도

빗물이 몰려들며 급류를 이뤄 다수가 사망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페트라의 나바테아인(Nabatean)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듯 물관리에 있어 천부적 소질을 발휘했다


내가 숙소를 잡은 와디무사가 산비탈이어서 비가 내리면 이 빗물이 모두 이곳 시크 쪽으로 쏟아질 테니

나바테아인은 댐, 수조, 관개시설을 만들어 홍수를 조절하고 가뭄의 시기에도 안정적으로 물 공급이 가능했기에

도시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크 양쪽으로 이렇게 팔라즈(falaj 관개시설)을 만들어 물 한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바위 투성이에 건설된 도시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당시 거주 인구는 약 3만 정도로 추산한다



왼쪽으로는 낙타, 말 등 동물들을 위한 식수 공급용이다




우측은 사람들을 위한 식수 공급로이다

물론 구배를 주어 물살의 유속까지 조절했다




혼례식 장소




낙타를 몰고가는 카라반 대상의 조각

풍화 침식으로 흐릿하지만 좌측으로 앞뒤 낙타발, 그 위는 낙타의 몸통이고 우측에 채찍을 든 대상의 몸통




한동안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던 협곡이 끝나고 어느 순간 인간의 섬세한 손길로 다듬어진 구조물이 불쑥 튀어나오듯 나타난다

알카즈네에 이른 것이다




알카즈네(Al Khazneh, The Treasury)


페트라에서 아데히르와 함께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구조물 중의 하나이다

사암 절벽 자체를 위에서부터 깍아 만들었는데 AD 1세기 아레타스 4세(Aretas IV)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알카즈네는 `보물`의 의미인데 유래는 19세기 이 지역의 베두인들이

1. 도적들이 약탈한 보물이 2층 항아리 속에 숨겨져있다

2. 모세와 동시대의 이집트 파라오의 보물창고였다

라고 믿은 것에 연유한다

이런 베두인의 믿음에 착안했음인지 1989년 영화 인디애나존스(최후의 성전)의 촬영지였다

2층 중앙 항아리 부위에는 보물을 찾기 위해 쏜 총탄 흔적들이 있는데 실제 숨겨진 보물은 없다





알카즈네는 높이 39.5 m, 폭 30 m




알카즈네 맞은편에 전망대가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왔기에 알카즈네에 이르자마자 서둘러 올랐다



알카즈네의 건물 높이가 40 m이니 내가 앉은 곳의 높이는 약 25 m 쯤일 것이다

바위를 깍아 만든 조각품이 이렇게 거대하고 섬세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니, 그것도 무려 2천년 전에........

인간의 손길에 의한 창작이라기보다는 바위에 어떤 마법이 일어나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거대한 조각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세계 신7대 불가사의`란 말이 역시 헛말이 아니다

양쪽 가장자리에 2줄의 홈은 바위를 위에서부터 깍아 조각할 때 사다리를 받쳤던 흔적이다




페트라의 전성기는 BC 1세기에서 AD 1세기 동안이었는데

알카즈네는 그레코로만  건축의 코린트 양식 건물이다

나바테아인은 사후세계를 아주 중요시했기에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신들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이층 중앙은 이시스(Isis) 여신이고 좌우는 도끼를 치켜든 수호신인 아마존 여전사이고

영혼을 실어가는 독수리도 네 마리 조각되어있다


이시스는 이집트의 여신으로 남편 오시리스가 세트에 의해 14조각로 나뉘어져 나일강에 버려지는 죽임을 당했을 때

시신 조각을 모아 남편 오시리스를 부활시키고 이후 이들의 아들 호루수가 세트를 죽임으로써 복수를 한다

오시리스는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신이고 이시스는 마법사로서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소생시키며

어머니로서 생명의 원천이었다


즉 페트라는 오래 전부터 이집트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훨씬 앞선 문명의 발생지였던 이집트의 문화를

일찌기 수용했음이다




데이비드 로버츠의 알카즈네 스케치


1812년 스위스의 탐험가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트(Johann Ludwig Burckhardt)가 페트라를 발견하고 쓴

`rediscovering`를 읽고 1839년 이곳을 찾은 스코틀랜드의 화가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의

페트라 스케치를 통해 페트라는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다




1층 출입문 양쪽의 조각상은 제우스의 아들이자 쌍둥이 신인  카스트로(Castor)와 플록스(Pollux)



파사드 거리(Streets of Facades)

알카즈네를 지나 아데히르 방향으로 향하면 바로 나타나는 공동 묘지(necropolis) 구역이다

나바테아인은 현세의 삶은 짧지만 사후의 삶은 영원하다고 믿었기에 건물의 전면부를 아름답게 장식했고

눈에 잘 띄는 장소를 택해 `영원의 집(home of eternity)`란 명문을 새겼다









왕가의 무덤(The Royal Tombs)

왕족의 무덤군인데 파사드 거리를 지나며 우측으로 나타난다

오랜 세월에 명문이 지워져 현재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4개의 무덤으로 좌로부터 The Palace Tomb, The Corinthian Tomb, Silk Tomb, The Urn Tomb




The Palace Tomb

로마의 궁전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The Corinthian Tomb

기둥 상부의 무늬를 코린트 양식으로 오해했기에


 

Silk Tomb

전면부 바위의 색깔이 다양한 게 비단을 닮았다고 하여



The Urn Tomb 

상부의 항아리 형태의 구조물에 기인한 이름이다





The Urn Tomb는 그레코로만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다



왕가의 무덤에서 바라본 Facade 거리






베두인(Bedouin)

베두인이 아니면 요르단에서 주류가 될 수 없다

베두인족은 외관상 속눈썹이 아주 길고 짙다

남자는 또한 수염이 아주 많아 얼굴 전체를 도배한 듯한데 면도를 하지않은 이상 보는 순간 일견 숯검댕이를 대하는 느낌이다

하루는 호텔 체크인 하며 실없는 농담으로

" 요르단 남자는 하나같이 도적놈처럼 수염이 시커먼데 여자는 어찌 그리 말갔죠? " 하니 접수 직원들이 모두 웃었다

한국에서 이러면 이것도 성희롱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요즘 한국 사회가 어찌 좀 삭막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원형극장(The Theater)

AD 25~125

바위 하나를 통째로 깍아 만든 그레코 로만 형식으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AD 106년 로마에 복속되기 전까지는 성지순례의 장소로, 로마 시대에는 집회 및 공연 등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열주거리(Colonnaded Street)

AD 100~200

로마에 복속된 후 건축된 240 m의 거리로 당시의 시내 중심으로 길 양측으로 각종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던 번화가였다

페트라를 황폐화시킨 AD 363 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대신전(The Great Temple)

BC 25 ~ AD 100

페트라에서 규모면에서 가장 커 면적이 약 7560 ㎢인 건물이다




Temenos Gate


열주거리와 신성 지역 Qasr Al-Bint를 구분짓는 경계이다



Qasr Al- Bint (the palace of Pharaoh`s daughter)


페트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지역이다

그리스 양식으로 지어진 높이 23 m의 건물로 26개의 대리석 계단을 올라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일반인은 밖에서 경배하고 신관만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대 석상의 손 부위가 발견되어 Dushara(제우스)신 내지 al-Uzza(아프로디테)를 모셨던 신전으로 추정한다


이름의 유래는 전설에 의한데

모세를 쫒던 파라오가 모세를 잡지 못하자 실망하여 보물을 알카즈네에 감추고 딸을 여기에 머물게 했다

파라오의 딸은 자신의 궁전에 물을 먼저 공급하는 남자와 결혼하기로 하는데 두 남자가 각기 다른 샘에서 동시에 물을 공급했다

이에 공주는 자신의 성공을 신에게 바친 보다 겸손한 남자를 선택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모세의 출애급 당시의 이집트 파라오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작년 이집트 여행을 가기 전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에서는 모세가 람세스 2세의 친구로 등장하는데

모세가 친구 람세스 2세를 배신하고 동족 히브리인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가 이집트 고대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지만 소설은 어디까지나 픽션이 더해진 것이고

보다 설득력 있기는 기록상 히브리인에 대한 최초 언급이 있는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렌프타 시기 때로 추정한다




여기까지 보다보면 자연스레 식당이 있는 지역에 이르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점심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이후 약 1시간 남짓 거리의 아데히르로 향하는데

바위 투성이 지역이어서 순전히 돌계단 길이고 땡볕을 피할 곳이라곤 전혀 없다








아데이르(Ad-Deir/The Monastery)


알카즈네보다 규모면에서 커 높이 50 m, 폭 45 m이다

나바테아인 왕 Obodas 1의 신전로 추정되는데 BC 86 년 그의 사망 후 제우스신과 동급의 신으로 추앙되었다

비잔틴 시대 때는 크리스천의 수도원으로 사용되었기에 일명 수도원이라고도 한다



아데이르 맞은편 찻집 옆으로 " Best View " 란 표지판을 따라 오르면 전망대에 이른다





 

 

사진 중앙의 산이 모세의 형, 아론(Aaron)이 묻힌 무덤이 있는 곳이다

모세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느보산에 묻혀 형제 모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데이르를 보고 돌아나오며 다시 본 알카즈네



시크에 들어 마지막으로 알카즈네를 뒤돌아보고 총총 걸음으로 빠져나간다



 

보도블럭은 2천년 전에 깔았던 것 그대로이다




여행 6일째 일정은 와디럼 사막의 지프투어이다 




와디럼사막(Wadi Rum)



요르단 남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평균고도 950  m

와디는 `계곡`의 의미이고 럼은 `높은`, `달`의 의미이니 와디럼은 `높은 계곡, 달의 계곡`이다

우기인 겨울에 비가 내리면 강이 되고 비가 내리지 않을 시기에는 말라 사막이 된다

3억 년 전 바다가 융기되어 형성 된 지형으로 아래는 사암층, 화강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막 모래가 붉고 바위산이 많으며 일반 사막에서 보이는 사구가 별로 없다는 게  특징이다

1911년 세계문화유산,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프투어는 픽업트럭을 개조하여 좌석을 만든 차량으로 진행되는데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경험상 사막투어를 하면 모래바람으로 인해 온몸에 모래가 들어가 나중에 샤워를 해도 여간 꼼꼼이 씻지 않으면

잘 제거되 않아 모래가 버석거리는 느낌이 남을 수 있고

더구나 과거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투어 시 운동화 속으로 들어간 모래는 아무리 털고 씻어도 결국 제거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어

조경을 포기할지라도 난 실내에 앉았다




영화 마션(Martian)의 촬영지였다

풍경이 그동안 보아왔던 사막과는 특이한 게 감독이 단번에 촬영지로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는데

곳에 따라서는 붉은 모래와 흰 모래과 대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막이라면 당연 낙타가 있어야 풍경이 완성된다

낙타는 사막의 배이니까...





와디럼 사막은 아라비아 카라반이 교역을 위해 다녔던 `왕의 대로`의 일부였다



1962년 제작된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Lawrence of Arabia)`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실제 무기를 감춰두었던 곳이다

영화는 1916년부터 아랍 지역에서 활동했던 영국군 장교 로렌스가 제1차세계대전 동안 아랍 민족족을

규합해 이 지역을 지배하던 터키에 대항해 아랍의 독립전쟁을 펼치는 영화로

로렌스의 저서인 `지혜의 일곱 기둥(The Seven Pillars of Wisdom`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1963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7개 부분을 석권했다



지혜의 일곱 기둥 바위






참 곱다 !!



미국의 아치캐년에 보았던 것과 유사한 아치(arch)도 보인다

아치는 바위가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침식 작용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Brudah Rock Bridge

미국에서는 이런 구조물을 아치라 하는데 이곳에서는 브릿지이다





암각화

`왕의 대로` 상에 있어 과거 향유 등을 싣고 이곳을 지나가던 대상들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낙타, 오스트리치,기린 등 다양한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시기는 약 2000년 전에 그려진 것이다




베두인 천막 내부




Mazayen Rum Camp 숙소




4시간 정도 사막투어를 하고 숙박은 와디럼 사막 한가운데 있는 캠프에서 1박을 한다

사진에서처럼 2인용 텐트를 다닥다닥 설치한 형태이다




사막 기후는 일교차가 유달리 큰 법이어서 사막의 밤은 꽤 추웠다

물이 쫄쫄 거리고 나오길래 사막이라 그러려니 하고 샤워를 시작했는데 도중 온수가 끊겨

어금니를 악문다고 해도 너무 추워 나도 모르게 치아를 딱딱거렸다

온몸에 비눗칠은 했고 어쩔 수 없이 군대 훈련받을 때  냉수마찰을 해본 이후 근 30년만에 졸지에 냉수 샤워를 해야했는데

그야말로 치떨리는 경험이었다

잘 때는 핫팩도 붙이고 츄리닝복도 입고 잘 잤다 




일출




여행 7일째, 와디럼 사막에서 3시간 30분 거리의 카락으로 이동한다



카락 성채(Karak Castle)


카락은 과거 모압 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당시 북부 암몬 왕국, 중부 모압 왕국, 남부 에돔 왕국)

왕의 대로상에 있다

카락 성채는 최초 1140년 예루살렘의 왕 Pagan이 베두인을 통치하고 왕의 대로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해 이후 십자군에 의해 증축된  성으로 1188년 이슬람의 살라딘에 의해 정복되었다

서유럽, 비잔틴, 아랍의 건축 양식이 혼재하는 성채이다




일견 지형상으로 주변보다 훨씬 높은 지역에 세워져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내부는 넓고 외부는 좁아 몸을 숨기고 밖의 적을 공격하기에 적합한 형태의 창








성 조지 성당(Saint George Church)


그리스 정교회로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30 km 떨어진 마다바(Madaba)에 위치하였다

6세기 비잔틴 시대 만들어진 예루살렘을 표현한 모자이크 지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 지도이다





교회도 다니지 않으면서 어찌 성지 순례하러 온 것처럼 되었는데 요르단이란 나라가 성지를 많이 포함하고 있으니 그렇게 되었다




6세기 비잔틴 시대 만들어진 모자이크 성서지도로 예루살렘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 타원형 부분이 예루살렘이고 윗쪽으로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모습이다

요단강에 뛰노는 물고기도 그려져 있다




성 조지(Saint George)

성 조지는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장군으로 기독교 박해로 사망한 후

그리스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인데 백마를 타고 용을 무찌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조지아(그루지아)는 성 조지에서 유래한 나라 이름이다



여행 8일째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일정을 시작한다




암만 성채(Amman Citadel)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구도심으로 최초 암만이 시작된 7개의 언덕 중 하나에 위치하였다

BC 18세기부터 축성이 시작되었고 BC 12세기 때 가장 번성했던 암몬 왕국의 수도이었다

이후 BC 8세기 때는 아시리아, BC 6세기 때는 바빌론, BC 1세기 때는 프톨레미 왕조, BC 1 세기 때는 로마, 

AD 3세기 때는 비잔틴, AD 7세기 때는 우마야드 이슬람 왕조 등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꽤 오래된 성채이다

현재 유적은 대부분 로마, 비잔틴, 이슬람 시대 때의 것이다




BC 331년 그리스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 이름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였다

현재 미국에 필라델피아가 있지만 필라델피아의 원조는 이곳이다




암만이 최초 시작된 7개의 언덕중 일부인 구도심




헤라클레스 신전(Temple of Hercules)

AD 161~166 건축




이슬람 시대 때의 우마야드 궁(Umayyad Palace)






제라쉬(Jerash)


제라쉬는 수도 암만에서 북쪽으로 약 48 km 떨어진 도시로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BC 331년 이집트를  출발해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원정을 떠날 때

늙은 마케도니아 군인들을 이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건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7세기 동로마제국 시절까지 번성했지만 749년과 그후 연이은 지진으로 도시가 폐허 상태로 변한 후

16세기 오토만 제국 시대에 이르러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제라쉬는 이탈리아가 아닌 곳 중에 그레코-로만 유적이 대규모로 잘 남겨진 도시 중의 하나로

'중동의 폼페이(Pompei of the Middle East)' 로 불린다

요르단에서 페트라 다음으로 큰 관광지이다




개선문(The Triump Arch, Arch of Hydrian)


AD 129~130년 로마의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히포드롬(The Hippidrome)

전차 및 검투사 등의 경기장




전차 경기에 열광했을 관중 객석

수용 관중 17,000





대열주거리(The Cardo Maximus)

길이 800 m




분수대(Nymphaeum)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The Corinthian columns)



장식(ornamentation)

돌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아르테미스 신전(Temple of Artemis)

제우스의 딸인 아르테미스의 신전이다





원형극장(Amphitheater)

평상 시 목소리로 이야기해도 전객석까지 잘 들리는 구조이다

관객 3000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제우스 신전(the Great Temple of Zeus)

AD 162/163 건축




 공회소(Oval Forum)



사해(Dead Sea)


동쪽 요르단과 서쪽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한 염호로 해발 고도  - 400 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수심은 최고 304 m이고 염도는 34%로 일반 바다의 9.6 배이며 현재 면적은 605 ㎢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수원은 대부분 요단 강물이다




자유분방한 서양 여성들



다소곳한 이슬람 여성

히잡은 그렇다고 치고 눈만 빼곰히 내고 다니는 부르카 여성은 얼마나 답답할까

자유를 맛본 사람은 구속에 도저히 견딜 수 없지만 처음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은

원래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걸까.....




역시 조금만 말리면 바로 소금이 될 듯해 보인다




머드팩 체험



사해의 Crowne Plaza호텔에 오후 3시경 도착해 호텔이 제공하는 타월을 받아들고 사해 물가로 내려갔다

아침 암만 성채, 오후 제라쉬를 둘러볼 때 비가 제법 내렸는데 그 때문에 요단 강물이 꽤 부풀었고

사해로 흘러들며 물이 맑지 못한 건 고사하고 파도가 꽤 있었다

부영 체험을 하며 몸이 둥둥 뜬 상태에서 읽을 책 한 권까지 준비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염분 농도가 워낙 높아 물방울이 눈에 들어가면 따가워 미친다는 가이드의 말을 고이 들어야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시원찮은 시력인데 아직은 더 볼 게 많으니 다른 말은 안들어도 이 말은 들어야했다

김이 푹~ 빠졌지만........




사해의 일몰





여행 9일차 아침



파도가 잠잠해졌다



이번 여행 중 마사지를 두 번 받았다

오만에서 제발샴 트레킹이 있던 날 아침 화장실에서 허리를 삐끗했는데 그날 트레킹은

미리 준비한 진통제를 복용한 덕분에 무사히 치뤘지만 허리 통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요르단으로 넘어온 첫날 밤 페트라의 호텔에서 마사지를 한번 받았다

난 평소 몸에 오일을 바르는 마사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작년 이집트 여행 시 나일강 크루즈 안에서 마사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온몸에 오일을 떡칠을 하듯 했는데

마사지 후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끈적함이 없어지지 않아 불쾌했던 경험이 있은 후 오일 마사지는 더욱 싫어한다


그래서 페트라에서는 사해 소금 마사지를 받았는데 이 또한 평생 잊지못할 경험이었다

이슬람 국가이니 당연 마사지사는 남성이었고 억센 손길로 온몸에 소금을 문질러대니 피부가 벗겨지듯 따가웠다

마사지 후 마사지사는 피부 미용과 건강에 좋다는 설명과 함께 사우나에 들어가 소금이 흡수되도록 십여분 정도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사우나에 들어가 채 몇 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그래도 마찰로 예민해진 피부인데 열기에 소금이 녹으면서 느껴지는 따가움이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피부 미용, 건강에 좋다할지언정 샤워실로 튕겨지듯 달려가 정신없이 씻어내야했다


이후에도 허리의 불편함이 없어지지 않아 사해 호텔에 오던 날 두 번째 마사지를 받았다

체크인 하는데 예쁘장한 여성이 쥬스를 건네며 다양한 마사지 프로그램을 권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슬람이 주종을 이루는 요르단의 여성은 아닌 것 같아 물어보니 필리핀 국적이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난 여성은 나의 기대와는 전혀 아랑곳없는 헤비급의 덩치에 억세고 뚱뚱한 여성이었다

생긴 모습에 걸맞게 손의 악력은 얼마나  센지 마사지를 받는 내내 으악으악~신음 소리를 내야만 했으니

허리 통증 하나 고쳐보려다 온몸 통증을 얻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젠장~~~유혹에 넘어간 내가 실수한 것이지.....




호텔 창밖으로 사해 넘어 이스라엘이 잘 보인다

어제보다 파도가 없고 물도 훨씬 맑아 보인다

지금은 부영 체험이 가능하겠지만 굳이 꼭 해보고싶은 마음이 없다

어제 마음이 내킬 때 해야지 이미 시간 지났다...



호텔풀장 체험만으로도 족하다


베다니로 간다



예수 세례터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곳은 분명 요단강의 이스라엘 쪽이 아니고 요르단쪽이다

내가 어떻게 이걸 아느냐고....

성경에 정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The place where Jejus was baptized`




요단강 세례터

현재는 어제의 빗물로 강이 불어 들어갈 수 없지만 평소에는 수위가 적당해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는다

이스라엘 국기가 나부끼는 강 맞은 편에는 성지순례단의 모습이 보인다

예수 세례터는 분명 이쪽이라는데....




산등성이 쪽에 보이는 도시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다




여리고

모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평원에 움막을 치고 지내는 동안 모세는 느보 산에서 숨을 거둔다

이후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 제일 먼저 접수하는 마을이 이스라엘의 여리고였다




모압평원

귀국을 위해 모압평원을 지난다

암만공항으로 가려면 사해에서 고도를 1000 m정도는 올려야한다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성지 순례도 했으니....


오만과 요르단을 여행한 설연휴는 중국의 춘절 기간이었다

엄청난 중국인이 해외여행을 나왔는데 오만은 비교적 적었지만 요르단 페트라에서는 옆에 부딪치는 사람이 중국인이었다

내가 식당에 들어가면 중국인줄 알고 종업원들은 마스크를 써기 바쁜 모양새이더니 현재는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의협에서 진작 중국인 입국을 금지해야한다고 수 차례 권고했지만 곧 끝날 것이라고 하더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모르면 전문가 말이라도 들어야지 고집를 부리더니 버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