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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9 그리스2<아크로폴리스,코린토스>

서영도 2022. 6. 9. 15:23

♣ 아크로폴리스(Acropolis)

 

150m  높이의 바위산 형태로 `아크로`는 `제일 높은`, `폴리스`는 `도시`의 의미이다

기원전 14세기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현존하는 주요 건물들인 파르테논, 에레크테이온, 니케 신전 등 대부분은 페리클레스(495-429 BC) 시대에 건축되었다

 

 

 

 

★ 디오니소스 극장(The Theater of Dionysos)

 

 

원래 술과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BC 6 세기에 건축되어 연극 관람을 위해 최대 17,000 명을 수용했다

3월에서 4월로 넘어갈 때 고대 아테네의 시민들은 이 극장에 모여 풍년을 기원하는 디오니소스 제전을 벌였다. 

제전의 꽃은 비극경연대회였다. 비극은 예술과 문화 활동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예배요 제의였다. 

따라서 극장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디오니소스 신을 기리는 예배당이었다.

서양 연극의 창시자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작품이 

기원전 5세기 이곳에서 작품이 공연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라는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어머니가 둘인 자’라는 뜻이다.

 

디오니소스(로마 이름 바쿠스)는 올림포스 12신 중 제우스와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그 출생 또한 독특하다. 

높은 올림포스 산 위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바람둥이 제우스의 눈에 확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테베의 공주 세멜레였다.

둘은 깊은 사랑에 빠졌고, 곧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질투가 시작되었다.

헤라는 유모로 변장하여 세멜레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 옆에 있는 제우스는 가짜 제우스예요."

세멜레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제우스에게 당신이 제우스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졸랐다.

 

제우스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세멜레가 졸라대는 통에 그만 자신의 상징인 번개와 천둥을 보여주고 말았다.

순간 인간 세멜레는 번개에 타 한줌의 재로 변하였다. 이 모든 것이 헤라의 계략인 줄도 모르고 당하고 만 것이다.

제우스는 재빨리 재가 된 세멜레의 몸속에 자라고 있던 아이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하여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달이 차자 제우스의 허벅지를 뚫고 디오니소스가 태어났다.

어머니 없이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눈길을 피해 니사의 요정들인 님프들에 보내져 자라게 되었다.

이곳에서 디오니소스는 포도를 재배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으며,

이 포도를 이용하여 포도주를 만드는 기술을 발견하였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었기에 그리스에서 그를 숭배하던 사람들은 오직 술에만 빠져 살았다. 

그들은 술에 취한 나머지 광란의 잔치를 벌였다. 이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시작이었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은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 춤을 추고 피가 흐르는 날고기를 뜯어먹었다. 

이 모든 것들은 오로지 그들이 숭배하는 디오니소스 신에게 드리는 제사였다. 

이렇게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종교가 탄생했다

 

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되고

435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동로마제국의 모든 이교 신전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비잔틴 시대에는 디오니소스 신전이 소실되었다가 19세기에 재건되었다

 

무대 맨앞쪽은 지정석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스토아(stoa)

치료를 위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찾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며

이곳에서 대기하면서 치유를 기다렸다

 

 

★ 아스클레피오스 신전(The Sanctuary of Asclepios/The Asclepieion)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사면에 위치하였는데 BC 420년 아테네 시민 텔레마코스가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조각상을

에피다브로스에서 가져오면서 건축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으로 아폴론의 아들이며,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의학의 상징적 존재였다.

어머니는 아레스의 아들인 플레기아스의 딸이자 테살리아의 왕녀 코로니스로,

아폴론이 코로니스를 애인으로 삼았을 때 같이 살 수 없으니, 하얀 까마귀를 전령으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코로니스는 인간 이스퀴스와 바람이 났고, 까마귀는 이를 잽싸게 아폴론에게 알려주었다.

분노한 아폴론은 코로니스를 활로 쏴 죽였으나 곧 후회하고 입이 싼 까마귀를 노려보았는데

태양신 아폴론의 눈이 너무 뜨거워 까마귀는 털이 모두 타버려서 검은 털을 갖게 되었다.

한편 코로니스는 죽을 당시 임신한 상태였는데, 숨이 떨어지기 직전 자신의 곁에 온 아폴론에게 사실을 알렸고

아폴론은 그 즉시 아이를 구했으니 그 아이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이다.

이후 아폴론은 아스클레피오스를 케이론에게 맡겨 보살피게 했다.

어려서부터 의술에 큰 관심을 두었던 아스클레피오스는 케이론에게 의술을 배우면서 의학의 길을 걸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마침내 죽은 사람까지 되살릴 수 있는 수준의 의술을 펼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테미스가 죽은 히플리토스를 데려와 그를 살리라고 명령하자 살려주는데,

이것에 화가 난 저승의 신 하데스가 제우스에게 아스클레피오스가 더 이상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신들의 간청을 수락한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죽게 된다.[

이때 히폴리토스도 같이 번개에 맞아 다시 저승으로 보내지고,

이 사건으로 인해 격분한 아폴론은 아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제우스의 번개를 만든 퀴클롭스들을 화살로 죽여 버린다.
아폴론을 달래려던 제우스에 의해 아스클레피오스는 별자리로 올려져 땅꾼자리가 되었으며 의술의 상징이 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병원의 역할도 하였는데

환자들은 꿈속에서 아스클레피오스가 나타나 기적처럼 치료해준다고 믿었다
물론 고대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병원이라고는 해도, 당시의 의료 수준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신전에서 요양하며 심신을 가다듬으며 자연 치유력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신전에는 목욕탕이 있어 신자들은 목욕재계를 하였는데,

고대의 위생 수준을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The Odeion of Herodes Atticus)

 

로마제국 시대인 AD 160-169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당시 웅변가이자 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 레길라(Rhegilla)를 위해 지었고 음악공연 및 철학 강의용으로 사용되었었다

195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현재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5000명을 수용한다

매년 여름철 아테네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세계적 성악가, 연주가 등이 이 무대에 서는데 조수미도 이 무대에 선 적이 있다

 

최초 건립 시에는 나무로 된 천장으로 덮혀있었다

 

아테네 페스티벌 모습

 

 


★ 프로필라이아(Propylaea, Propylon)

 

신전의 입구를 의미하며 속세와 신성한 공간을 구분하는 문으로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신들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중앙의 대문 역할을 하는 건물과 양쪽의 회랑 건물, 오른쪽의 니케 신전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집합 건축물이다.

 

 

 

 

 

 

★ 아테나 니케 신전(Temple of Athena Nike)

 

아테나와 니케 신에게 받쳐진 신전으로 420 BC에 이오니아식으로 건축되었으며

프로필아이아 바로 우측에 위치했다

 

승리의 여신 니케와 더불어 아테나 여신에세 바쳐진 신전이다

스파르타 주축의 펠로폰네소스동맹과 치룬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델로스동맹의 아테네가

승리하기를 염원하는 의미에서 건축했다

 

니케는 승리의 여신으로 현재 세계적인 상표 나이키는 여신 니케(Nike)에서 따온 명칭이다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 동안 지속된 펠레폰네소스전쟁에서 결국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함으로써

문화적으로 가장 진보한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원전 168년 마케도니아가 피드라전투에서 로마에게 패함으로써 그리스는 멸망한다

이후 그리스는 근 200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다 1829년에야 독립한다

 

 

 

 

★ 에레크테이온신전(Temple of Erechtheion)

 

 

406 BC에 건축되었다

고대 아테네의 신화적 영웅인 에레크토니우스 외 아테나, 포세이돈 신를 위해 지은 신전이다

`카리아티드`로 불리는 6명의 여인이 받치고있는 형상의 기둥이 특징인데

이곳의 카리아티드는 복제품으로 5개의 진품은 어제 보았던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 있고, 1개는 대영박물관에 있다

 

 

 

아테나 여신이 자신의 무기 제작을 의뢰하러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을 찾았을 때

헤파이스토스가 아테나에게 구애를 했느데 아테나가 이를 거절하자 아예 겁탈을 하려했다

화가 난 아테나가 밀치자 헤파이스토스는 아테나의 허벅지에 사정을 해버린다

아테나는 양모을 주워 정액을 닦은 뒤 땅위에 던져버렸는데

이로 인해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생각지도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가이아는 출산 후 아이를 아테나에게 주며 `네가 어미다`라고 하며 양육을 맡겼는데

이 아이가 성장하여 훗날 아테나의 왕이 된 에레크토니우스이다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아테나의 방패를 `아이기스(Aegis)`라고 하는데

위력이 대단해 벼락을 맞아도 부서지지 않으며 방패를 흔들면 폭풍이 일어나는

강력한 것이었다

꿈의 전함이라 불리는 미국의 이지스함은 아이기스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아이기스 방패처럼 강력한 방어력과 공격력을 보유한 최강의 전함이란 의미이다

 

카리아티드

 

페르시아전쟁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연합군이 패할 것이라고 생각한 펠레폰네소스반도의 작은 도시국가 카리아(Caryae)는페르시아 편에 섰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배반에 대한 응징으로 그리스 연합군은

배신자 국가인 카리아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만들었다

당시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모든 여자와 아이는 노예가 되던 시절이었는데

배반에 대한 경고의 의미이자 평생 신전 지붕을 떠받치는 형벌의 형상으로

카리아 여인을 조각한 것이다

 

 

★ 파르테논 신전

 

세계문화유산 제1호이다

유네스코의 로고로도 사용되는  건축의 아름다움 자체로 평가된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최고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정치가이자 군인인 페리클레스(Perikles)의 주도로

그의 친구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 건축가 이크티누스(Iktinos),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에 의해

기원전 447- 438년건축되어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파르테논`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집`을 의미하는데 처녀는 즉 아테나 여신(Athena Parthenos, virgin)이다

 

신전의 장식으로 동쪽에는 아테나의 탄생,

서쪽에는 새 도시의 수호신을 놓고 벌이는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경합이 조각돼 있었다.

또 건물 외벽 상부에는 그리스 신과 거인족의 싸움을 묘사한 조각을 비롯해 테살리아의 라피트스(Lapiths) 부족과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의 전투, 테세우스와 아마존족의 전투, 트로이 전쟁 등이 총 92면의 작은 벽에 묘사돼 있었다.

현재 조각의 대부분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일부가 파르테논 동쪽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다.

 

파르테논 신전을 모티브로 한 유네스코 로고(좌)와 깃발(우)

 

길이 69.51m, 폭 30.86m, 높이 15m

세로면  17개, 가로면  8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건축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었고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687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던 시절, 베네치아와의 전쟁 때

무기저장고로 사용되던 신전에 폭탄이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나며

신전의 지붕 전체가 날아가는 등 신전의 반 정도가 훼손되는 큰 손상을 입었다

 

파르테논의 건축 자금은 델로스동맹의 금고에서 나왔다

3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을 치른 후 아테나가 주축이 되어 향후 페르시아의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해

델로스 동맹을 맺고 동맹 유지에 필요한 자금의 금고를 델로섬에 두었다

그러나 나중에 페르시아 침입의 우려로 자금을 파르테논 신전에 이동 보관하였데

페리클레스가 이 동맹 자금을 유용해 파르테논 신전 건축 자금으로 충당했다

자금의 횡령에 대해 동맹이 항의하자 페리클레스는

`우리가 너희들을 페르시아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느냐`고 항변했다고 한다

아테나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을만한 인물다웠다고 할까.....

 

 

 

언뜻 보기에 파르테논은 순전히 수학적 건축물 같다

재료를 수직, 원 혹은 삼각형, 직선의 형태로 잘 배열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너비, 높이, 길이 사이의 황금비율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면에 불과하고 파르테논의 본질은 아니다

파르테논을 살아있는 건축물로 만든 힘은 비틀기에 있다

 

신전 기둥은 도리아식으로 기둥 모두가 아주 올곧게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둥은 완전한 직선의 기둥이 아니라 중앙 부분이 약간 볼록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면서

전체적으로 안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신전 건물이 전체적으로 상승하는 느낌이 들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 그런 것이다

기둥이 완벽한 직각이라면 천장과 박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았을 수도 있다

파르테논은 이런 현실적 필요조차도 예술로 승화시켰다

 

계단도  직선이 아니고 가운데가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다

멀리서 보면 직선은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해 가운데를 살짝 높인 것이다

 

BC 438년,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완성한 페이디아스의 건축술이 정말 놀라울 뿐이다

 

 

 

 

파르테논에는 원래 금과 상아로 만든 높이 12m의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 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상아가 상하지 않도록 아래에 수조를 놓아 습도까지 조절했다고 한다

5세기 아테나 여신상은 동로마 황제에 의해 약탈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이후 여신상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이 벌어졌을 때 파괴되었다

 

메토프, 인간과 싸우는 켄타우로스

 

파르테논 신전이 건축된 것은 447~438 BC이지만 파르테논을 장식 조각이 완성된 것은 432 BC이다

조각은 메토프 92개, 프리즈, 동서 박공면 조각 등이다

메토프는

동쪽면은 올림포스 신들과 타이탄 거인족의 싸움인 Gigantomachy, 북쪽면은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 장면인 Iliou persis,

서쪽면은 도시를 위협하는 아마존을 격퇴하는 Amazonomachy, 남쪽면은 그리스인과 켄타우로스의 전쟁인 Centauromachy로 장식했다

박공면은

동쪽은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나는 장면을,

서쪽은 아테나 수호신의 자리를 두고 아테나 여신과 포세이돈의 싸움 장면을 묘사했다

프리즈는

길이 160m로 시민과 아테네 군인이 참여하는 판아테네 축제를 묘사하고 있다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아크로폴리스 서북면의 작은 언덕(115m)으로

`아레스의 언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reo Pagos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에 연유하여 현재 그리스 대법원을 `아레이오스 파고스(Areios Pagos)`라 한다

 

아레오파고스는 인류 최초의 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할리로티오스(Halirrothios)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샘 근처에서

아레스의 딸 알키페(Alcippe)를 겁탈하려 했다가 아레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알키페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아테네 왕 케크롭스(Kekrops)의 딸 아글라우로스(Aglauros)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이 최초의 살인 사건을 단죄하기 위해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재판이 열렸다.

포세이돈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레스를 아테네 법정에 고소했던 것이다.

신들끼리의 송사(訟事)가 벌어진 것이다.

올림포스 12신은 투표로 아레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딸의 순결을 보호하려던 아버지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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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언덕이 유명해진 것은 신화와는 관계없는 인물, 사도 바오로 때문이다

 AD 51년 선교를 위해 아테네를 찾은 바오로 사도가 이 언덕에서 아테네인들에게 설교를 했다

작은 돌산같은 형상으로 입구 우측으로 사도행전 17장 22-34절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그리스의 5월로서는 이상기온이라고 할 정도로 아크로폴리스를 둘러보기 시작할 때부터 바람이 꽤 불고 춥기까지 했다

아레오파고스에 올라섰을 당시 바람은 거진 태풍 수준이어서 몸을 가누기 쉽지 않았다

바람둥이 제우스가 또 어느 여인을 집적거렸음인지 이를 눈치챈 헤라와의 부부싸움이 시작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전면으로 바라보이는 작은 언덕이  `필로파푸스` 이다

`필로`는 `착한` 의미이고 `파푸스`는 `할아버지`란 의미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을 당시 피로파푸스란 로마 집정관이 선정을 펼쳤기에

그를 착한 할아버지로 불렸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크와와 베네치아 간에 전쟁이 발생했을 때

베네치아가 대포를 저곳까지 끌고 올라와 이곳을 향해 포탄을 쏘았는데

무기저장고로 사용되던 파르테논 신전에 포탄이 떨어지며 대참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아레오파고스에서 바라본 아테네 시내전경

 

 

♣ 코린토스 (Corinthos)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이자 현대의 도시이다

그리스 중남부의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로부터 78km 남서쪽이고

사로니코스만과 코린토스만을 가로지르는 지협(이스트모스)에 있어 남북육상교통의 요충지이며,

북쪽으로는 이오니아 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리온 항구를 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켄크레이 항구를 품은 해상교통의 요지로 크게 번영한 도시이다

 

과거 사도바울이 클라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코린토스로 이주한 2만5천 명의

유대인에게 전도하고 1년 6개월을 머물며 교회를 세우고 떠난 후에 걱정이 되어 보낸 편지 2편이 

성경에 수록되어 코린토스 전, 후서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초토화된 후 백 여 년이 지난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재건되어

최고의 국제도시로 재개발되었는데 심한 빈부격차와 퇴폐적 윤리생활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과일을 주식으로 하다시피 하지만 난 오렌지를 별반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날 코린토스에서 점심 식사 때 전식으로 나온 오렌지 쥬스는 전혀 별다른 맛이었다

한국에서처럼 수입하느라 냉장보관되었던 오렌지가 아닌 신선한 오렌지로 곧장 짠 쥬스인데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코린토스는 지브롤터처럼 돌출한 아크로코린토스(해발 575m)의 성채 아래에서 성장했다

기원전 8세기 코린토스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정치적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코린토스의 인구가 25만, 노예 40만이었다고 하니 현재 코린토스 인구 3만에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코린토스에는 12개의 신전이 세워졌는데

산정상 아크로코린토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는 종교적 매음 행위가 이루어졌다

1000여명의 여성 사제는 신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매춘에 봉사했다

코린토스의 이런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코린토스인과 같이 행한다`는 말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한다`는 의미였다

 

 

 

★ 글라우케 샘(Glauke Fountain)

 

글라우케는 코린토스 크레온 왕의 딸 이름으로 아이손과 결혼하려다 이아손의 아내이자 마녀인

메데이아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그 내용인즉슨

 

테살리아의 도시 이올코스의 왕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어린 아들 이아손이 있었는데

아들이 성장하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조건으로 왕위를 동생 펠리아스에게 양위한다

아들 이아손은 당시 최고의 선생이었었던 켄타우로스에게 맡겨져 촤고의 전사로 성장한다

시간이 흘러 이아손이 숙부 펠리아스를 찾아가자 펠리아스는 흑해 동부연안의 황금양피를 구해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며

실현 불가능한 제안을 한다

 

이아손은 황금양피를 구하기 위해 50여명의 그리스 영웅을 모아 원정대를 구성한다

그중 당대 최고의 목수인 아르고가 있어 50명을 태울 수 있는 튼튼해 배를 만들고 `아르고호`로 명명한다

아르고호 원정대는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는 콜키스의 황금양털을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가져온다

메데이와와 함께 돌아온 이아손에게 펠리아스는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아이손을 없애 궁리를 한다

 

마녀 메데이아는 이를 알아차리고 펠리아스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메데이아는 펠리아스의 딸들에게 늙은 양이 어린 양으로 변하는 마술을 보여준다

늙은 양을 끓는 물에 담근 후 마법의 약을 타고 잠시 후 꺼내니 어린 양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본 펠리아스의 딸들은 아버지도 젊게 만들겠다고 끓는 물에 넣는데 마법을 멈추자 펠리아스는 즉사한다

펠리아스의 아들 아카스토스는 왕의 살해혐의로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추방하고 고린토스로 가게된다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환대 속에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자식을 낳고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린도 사람들은 외국인이며 마법의 힘을 지닌 메데이아를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이아손도 점차 마음이 멀어졌다. 이에 크레온은 자신의 딸 글라우케를 이아손과 결혼시키려고 하였고

이아손도 승낙하였다. 크레온은 메데이아를 나라 밖으로 쫓아낼 것을 명령하였다고도 한다.

 

아버지 아이에테스를 배신하고 동생까지 죽이면서 이아손을 따라온 메데이아는 복수를 결심하고는

글라우케에게 결혼 축하 선물이라고 하면서 아름다운 옷 한 벌을 주었다.

글라우케가 그 옷을 입는 순간, 메데이아가 옷에 묻힌 독이 온몸에 퍼지면서 불타 죽었고,

딸을 구하려고 끌어안은 크레온도 함께 타 죽었다.

메데이아의 복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낳은 두 아들마저 죽이고 고린토스를 떠난다

글라우케가 몸에 붙은 불을 끄려 이 샘에 뛰어들었다고 하여 글라우케 샘이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중 한 사람인 에우리피데스는 이 내용을 `메데이아`로 남겼다

 

 

♧ 코린토스 박물관

 

아르테미스 여신상

 

프리지아 노예 동상

아테네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티드처럼 기둥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노예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좌상부 중앙의 부조 모습에 연유하여 혹자는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의 주택에서 발견된 바닥 장식용 모자이크,

2~3세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머리 부분의 포도와 상아 장식,가장자리에 디오니소스를 축복하는 헌주잔으로 묘사되는

귀 모양의 손잡이가 양쪽으로 달린 칸타로스(Kantharos)와 포도넝쿨이 디오니소스를 나타낸다

 

2세기 목동의 모자이크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조각품.

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치료된 후 신체 부위의 조각품을 신전에 봉헌했다

매음이 성행했던 만큼 성병이 많았을 테고 치유된 후 조각품을 만들어 신전에 봉헌한 것이다

 

코린토스는 사치와 향락의 도시였다

정치와 행정의 중심도시였던 아테네의 인구가 12만이었던 반면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한 번창한 도시였고 당시 거주 인구가 20만의 대도시였다

많은 외지인이 드나들며 향락의 도시로 변했으니 성병이 만연했음은 당연했다

 

 

 

아칸토스

이 꽃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기둥양식을 코린토식 기둥이라 한다

 

옥타비아누스 황제의 신전

윗사진에서 설명한 것처럼 코린토 양식의 기둥이다

 

아무런 장식이 없으면 도리아식,

양의 뿔처럼 둥그렇게 말린 장식이 새겨지면 이오니아식이다

 

코린트에 처음으로 나라를 창업한 사람은 시시포스(Sisyphos)였다. 

시시포스의 이야기가 처음 나온 문헌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이다

시시포스의 신화는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해진다

 

하나는 시시포스가 비행을 일삼다가 그 죄값으로 저승에 가서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시시포스는 어찌나 교활했던지 저승 세계의 지배자인 하데스마저 감쪽같이 속였다.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던 그는 지하 세계로 가지 않을 비책을 꾸몄다.

만약 죽게 되어 지하세계에 불려가더라도 탈출할 수 있는 방책을 미리 세워두었다.

그는 생전에 아내에게 자기가 죽더라도 시체를 묻지도 말고, 또 울거나 제사를 지내지도 말 것을 당부했다.

그가 죽어 하데스에게 갔을 때 그는 지상에 잠깐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죽은 남편을 위해 울지도 않고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 못된 아내를 징벌하고 오겠다는 명분이었다.

하데스는 아내의 배신에 치를 떨며 보복하고 오겠다는 시시포스의 눈물겨운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게 하데스의 허락을 받고 잠시 지상세계로 돌아온 시시포스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아내와 재회했고,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데스는 그제야 시시포스에게 속은 걸 알고, 헤르메스에게 시시포스를 붙잡아오도록 명령했다.

다시 잡혀온 시시포스에게 하데스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형벌을 내렸다.

 

또 다른 버전은

시시포스가 죽지 않으려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결박했고

이에 제우스가 노하여 시시포스에게를 처벌을 내렸다는 이야기이다

형벌은 지하 세계의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서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바위는 산꼭대기에 올려 놓으면 다시 떨어졌기에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바위를

다시 산 정상에 올려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반복이라는 형벌이었다

 

 

아폴론 신전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이다

원래 38개의 기둥이 있었는데 지진 등의 피해로 현재는 7개만 남았다

기둥은 도리아식으로 돌 하나를 통째로 조각해 만들었다

 

 

코린토스는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항해 중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로서 일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디오게네스는 어느 폴리스의 주민이냐고 물으면 언제나 `세게의 국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재판터(Bema)

 

클라우디스 황제가 아꼈던 세네카의 형, 가이오 총독 시절 유대인의 고소로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았다

(사도행전 18:12~17)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도 아니고 피고가 법을 어긴 부분이 없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AD 52~52년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스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고대 코린토스가 아프로디테를 숭상하며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임을 목격하고

코린토스인들의 음행을 꾸짖으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하는 유명한 구절의 코린토 서를

코린토스 성도에게 보내 권유하였다

 

 

아고라(Agoa)

신전, 별장, 극장, 상점, 공중목욕탕, 도기제조소, 단련장 등의 거물터가 들어서 있는 아고라 일대

현재 코린토스는 인구 3만의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무심히 널브러진 폐허의 돌 무더기는 그 옛날 이곳에 번성하고 향락적 도시가 존재했음을 여실히 반증하고 있다

 

레카리온 거리

이 길을 따라 곧장 레카리온 항구로 연결되었다

 

 

코린토스 운하

 

세계3대운하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반도 사이에 있는 운하로서

서쪽 이오니아 해(코린토스 만)와 동쪽 에게 해(사로니코스 만)를 연결한다

길이 6.3km, 폭 25m, 다리에서 수면까지 약 80m이다

 

고대 운하가 개설되지 않았을 때는 380km나 되는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돌아서 항해해야하고 위험했다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는 배를 들어올려 코린토스 만과 사로니코스 만 사이의 6.3km를 끌어서 옮겨줄

포장도로(디올코스, Diolkos)를 닦아 엄청난 통행세를 챙겼다

코린토스를 통해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오가며, 멀리는 이탈리아반도와 소아시아를 잇는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번 상인들이 코린토스에 머물면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사제들과의 사랑을 탐닉하며 

돈을 아낌없이 탕진했다

또한 배를 옮기는 일에 종사한 노동자 수 또한 엄청 많았으니 자연히 향락의 도시 코린토스는

도박과 아프디테 신전의 여사제와의 매춘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매춘도 지금 현대의 시각으로 볼때 매춘이지만 당대에는 여사제가 신전에서 행하는 성스러운 행위였을 수도 있다.....

 

 

운하 공사는 67년 네로 황제가 6,000명의 히브리 노예로 시작했는데

이듬해 네로 황제가 죽고 이어 즉위한 가르바 황제가 경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중단했다

이후 1,881년 다시 공사를 시작해 1893년 완공되었다

즉 착공부터 완공까지 1,800년이 걸렸다

 

 

여기에도 번지 점프대가 있다

 

코린토스의 KIng Saron호텔에서 내다본 풍경

 

에게해 바다를 낀 휴양지호텔이기에 나처럼 하룻밤만 머물고 가는 사람보다는

유럽 각지역에서 휴양차 와서 한 달씩 머무는 사람이 더 많다

천년만년 살지도 못하는 인생, 이들처럼 더 여유있게 즐겨야하거늘

고작 이 주만에 그리스 일주를 할 작정으로 왔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