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25 그리스8<로도스>
호텔 창문에서 바라본 로도스 앞 에게해
비치 파라솔이 해변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어 휴양지의 분위가가 물씬하다
로도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363km나 떨어져 있지만 튀르키예와는 1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에게해의 섬들은 지리적으로 튀르키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조차 그리스의 땅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고대에는 에게해 연안의 튀르키예 도시들이 대개 그리스인들이 세운 폴리스였다
♣ 로도스 아크로폴리스(Acropolis of Rhodes)
도심에서 약 3km 떨어진 스미스 언덕(Monte Smith) 위에 있는데
기원전 5~3세기 건축되었다
여느 아크로폴리스처럼 요새화되어 있지는 않다
아폴로 신전(Temple of Pythian Apollo)
음악당(Odeon)
수용 인원은 약 800명
스타디움(Stadium)
로도스가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 때는 경제적으로 아테네보다 더 번성하기도 했지만
학문적으로도 로도스는 중기 스토아 학파의 중심지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젊은 시절 로도스에서 유학한 적이 있었다
로마 정치인으로서 필수였던 웅변술을 배우기 위해 로도스 유학길에 나서 해적에게 납치되었을 때
해적은 몸값으로 20탈렌트를 요구했다
당시 20탈렌트는 군사 4,300명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금이었는데
카이사르는 오히려 자신의 몸값이 턱없이 낮다고 50탈렌트로 상향했었다
종을 시켜 본국으로 돈을 가지러 보낸 사이 카이사르는 잠도 편하게 자고 해적들과 어울려 놀기까지 했다
마침내 50탈렌트를 지불하고 풀려난 후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해적을 소탕한 후 50탈렌트도 되찾았다
만드라키 항의 청동 사슴상
고대에는 청동사슴상 자리에 두 발을 벌리고 선 태양신 헬리오스의 거대 청동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로도스 거상(Colossus)`으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로도스`는 `장미`의 의미인데 태양신 헬리오스의 연인이다
그러니 로도스는 당연 헤리오스 신을 모셨다
신화에
어느 날, 제우스는 신들과 함께 회의를 했는데 세상의 모든 땅을 골고루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헬리오스는 신들의 모임에 참가하지 못했다.
다른 신들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땅을 모두 나눠 가졌고 그를 위해서는 아무런 땅도 남겨두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헬리오스는 제우스에게 따졌다
헬리오스는 바다 깊은 곳에 봐둔 땅이 하나 있으니 그것을 갖겠다고 했다.
얼마 후, 그의 말대로 커다란 섬이 바다 위로 떠오르자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삼았다.
헬리오스는 그곳에서 아프로디테의 딸 로도스와 누워 사랑을 나누었고, 둘 사이에는 일곱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다른 작가들에 따르면, 로도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딸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섬은 로도스라 불리며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섬이 되었다.
로도스인들이 섬의 초입에 그의 거상을 세운 건 그런 까닭에서였다.
고대 7대 불가사의(Thaumata)는
비잔티움 출신의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필론이 알렉사드로스가 정복하여 이른 거대한 제국 이곳저곳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경이로운 건축물을 탐방라고 남긴 기록에 따른 것인데
1. 바빌론의 공중정원
2.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3. 터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4. 터키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5.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6.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7. 로도스 헬리오스 거상
로도스 거상 상상도
'로도스 거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안티고누스의 치열한 전쟁이었던
디아도코이 전쟁의 일부였던 로도스 공성전(Siege of Rhodes)의 결과로 세운 것이다
당시 로도스 인들은 이집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를 지지했고,
이에 기원전 305년 안티고누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4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로도스를 포위 공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두 채의 거대한 공성탑(攻城塔)을 세웠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첫 번째 탑은 폭풍우 때문에 무너졌고, 두 번째 탑은 방어군이 도시 성벽 둘레의 수로에 물이 넘치도록 하자
진흙 속에 붙박여 버렸던 것이다.
기원전 304년 프톨레마이오스가 파견한 군대가 로도스에 도착하자 데메트리오스는 철수했다
로도스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수호신인 헬리오스에게 바치는 33m 높이의 조상을 항구 입구 대좌 위에 세웠다
제작은 도시를 방어하는 데 참여했던 카레스라가 조상의 설계를 맡았으며,
석재와 철로 제작해 적이 버려두고 간 무기에서 얻은 청동판으로 덮었다.
제작에는 12년이 걸렸다
로도스의 거상은 56년 동안 서 있었으나, 기원전 224년 지진으로 양 무릎이 꺽이며 넘어지고 말았다.
서기 1세기에 이를 본 사람의 기록에
"양팔로 엄지손가락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이가 드물었으며, 손가락만 해도 대부분의 조상보다 컸다" 고 한다
성 니콜라스 요새(Fort St. Nicholas)
로도스는 1309년부터 1522년까지 성 요한기사단이 점령하며 요새화되었는데
1480년 오스만의 1차 공격 이후 그랜드 마스터 오뷔송이 바다 경비를 목적으로 건설했다
로도스 섬 투어 유람선
♣ 그랜드 마스터 궁전
1309년부터 로도스섬에 터를 잡은 성 요한 기사단이 비잔틴 성채를 요새화하여 지휘부로 사용하며
로도스를 거대한 성곽도시로 만들었는데 그랜드 마스터 궁전은 지휘부가 되었다.
성요한 기사단은 11세기 로마에서 설립되어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세례요한 묘지에 진료소를 세우고
질병 치료, 빈민 구제 목적으로 창설되었지만 나중에 전쟁을 수행하는 기사단과 합쳐지며
성 요한 기사단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과 설교와 선교를 담당하는 성직 계급,
의료와 구호 활동을 맡는 봉사단으로 역활을 분담했다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점점 의료봉사, 종교 단체의 성격에 더해 군사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기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여 가장 먼저 성지 탈환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성 요한 기사단은 1291년 무슬림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키프로스를 거쳐
1309년 로도스에 정착하였다.
그후 1522년 오스만 튀르크에 패해기 전까지 2세기 동안 이어진 성 요한 기사단의 점령기는
로도스의 르네상스 기간이었다
이탈리아 지배 시절 독재자 베니토 뭇솔리니의 휴양 별장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랜드 마스터 궁전 입구로 들어가는 거리 풍경
게이트 담부아즈(Gate d`Amboise)
1512년 건축
로드마스터 궁전의 출입구로 대포의 공격에 대비한 완벽한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다
난공불락이라 여겨진던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1453년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된 후 포탄의 타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더 두터운 성벽을 쌓고 더 넓게 해자를 파는 등 성채 개조 작업이 이루어졌다
해자
둥근 돌은 과거 전쟁 시 사용되었던 포탄
해자가 이중으로 설치되었다
오스만 튀르크는 로도스 섬을 두 차례 침략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세력이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1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코앞의 로도스에 기독교 군사기지가 있으니 목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로도스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침략은 1480년 술탄 메메드 2세 때였다
이때 튀르크 군은 10만이었는데 이슬람 진영에 역병이 돌며 사기가 떨어지면서 퇴각하는 것으로 끝났다
두 번쨰 침략은 1522년 7월 28일, 술탄 슐레이만 1세가 이끈 20만 대군과 로도스의 7500명 수비대 간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1차 전쟁의 경험을 교훈 삼아 2차 침략을 이끈 28세의 슐레이만 1세는 점령지가 아닌 후방 마르마리스에서
보급품을 조달한 덕에 공격의 끈을 늦출 필요가 없었다
희생자가 터키군 5만, 로도스 수비대 2천명으로 양측 모두 1/4 이상이 희생된 치열한 생존 전장이었다
그러던 중 기사단 내부에서 기사단 인사에 불만을 품고 튀르크 군과 내통한 기사들이 생겼다
이들은 로도스 성에서 처형당했지만, 12월 29일 슐레이만 1세는 로도스 성에 입성했다
성 요한 기사단은 항복을 조건으로 다름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성 요한 기사단이 떠나던 날, 지독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오스만 튀르크가 로도스에 잔류한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이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피로 로도스 앞바다가 붉게 물었다고 한다
이후 성 요한 기사단은 지중해에 있는 몰타 섬으로 옮겨 활동했다
성 안소니 게이트(St. Anthony`s<St. Athanasios) Gate)
1522년 술탄 슐레이만 1세가 점령한 후 또 다른 침입자가 들어올 수 없도록 폐쇄하였는데
1922년 이탈리아가 점령하며 다시 열렸다
중정(coutyard)
그랜드 마스터 궁전은 고딕식 건축 양식이다
성 요한 기사단의 가장 높은 직책이 그랜드 마스터인데 `콜로시아니(colosiani)`라 불렀다
항구 입구에 있다가 지진으로 넘어진 로도스 거상 콜로서스의 후예라는 뜻이다
그랜드 마스터는 형식상 로마 교황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교단 지도자 협의체에서 뽑았고, 그리스에 주재하는 대주교 임명권까지 행사했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일곱 개 언어를 사용하는 지도자와 문장(紋章)이 각기 다른 국제적인 조직이었다
일곱 개의 창은 일곱 지도자의 조직임을 의미한다
창이 일반적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다
바닥 모자이크
메두사 모자이크
기원전 2세기 작품으로 코스 섬에서 가져왔다
탈리아(뮤즈) (Thalia, Muse)
코스 섬에서 가져왔다
희극을 주재하는 여신으로 희극적 가면과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나온다
오늘날 공연 예술의 상징으로 형상화된다
라오콘 군상
모조품으로 진품은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있다
기원전 140년 로도스 섬의 조각가인 아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의 청동원작을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기에 스페를롱가 공방에서 모각한 것으로 헬레니즘의 최대 걸작으로 불린다.
뱀에게 물려 빈사 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중심으로 우측에 뱀과 싸우는 아들과
좌측에 이미 숨을 거둔 또 다른 아들이 배치되어 있다.
격한 움직임과 생생한 육체묘사를 통해 죽음의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조각은 네로 황제가 자신의 황금궁전에 진열하려고 로도스 섬에서 가져간 후
로마의 멸망으로 땅속에 묻혀있다가 1,506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인근 포도밭에서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는 건축가 상갈로의 손을 거쳐 교황 율리오 2세의 컬렉션에 들어가게 된다.
상갈로는 미켈란젤로에게 이 조각을 감정하게 했는데 조각 덕후였던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품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교황은 농부로부터 라오콘을 즉시 구입해 대중이 감상할 수 있게 공개해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있게 되었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아폴론 신전 사제였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목마를 트로이의 아테나 신전에 바치는 선물이라고 속일 때 이를 알아차리고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는 목마의 복부에 창을 던져 그리스 군이 숨어있는지 확인하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그리스군의 편에 서 있던 포세이돈이 이에 분노하여 큰 바다뱀인 피톤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죽게 했다고 한다.
참고로
트로이의 왕 파리아모스의 딸인 카산드라도 라오콘과 같은 주장을 했지만,
그녀는 아폴론의 사랑을 거절한 죄로 예언의 설득력을 잃었기에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이후 패전국의 공주로 아가멤논을 따라 미케네 궁으로 갔으나
아가멤논의 부인 클뤼타임네스트라에 의해 살해된다
기사단 거리(Street of the Knights of Rhodes)
대형 크루즈가 여러 척 정박해 있다
로도스가 한국인에게는 크레타, 산토리니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경향이 있지만
현지 유럽인들에게는 꽤 유명한 휴양관광지인 것 같았다
그랜드 마스터 궁전 원경
로도스 성채는 길이 4km에 두께가 12m에 달하는데 중세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오늘날까지 건재하다
♣ 로도스 고고학 박물관(Archeological Museum of Rhodes)
그랜드 마스타 궁전 내부에 있다
고딕 양식의 아케이드
성 요한 기사단 병원 내부
목욕하는 아프로디테(Aphrodite bathing, Rhodes Venus)
기원전 3세기, 디오달사스의 조각
헬리오스 신 두상, 기원전 2세기
피토스(Pithos)
주둥이가 큰 항아리로 술, 곡식의 저장 및 시신 매장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600~575년
기원전 550~525년
구시가지(old town) 모습
로도스는 구시가지(old town)과 신시가지(new town)로 구분되어 있다
구시가지는 15세기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198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히포크라테스 광장
따가운 햇살과 더위를 피해 우측 카페에서 시원한 오렌지 쥬스를 한 잔 마시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자리에 앉은 채로 사십 여분은 졸았을 것이다
로도스 old town을 약 두 시간 정도 배회했다
더위에 지쳐 아이스 크림을 입에 물고 어슬렁거리기도 하면서.....
전날 린도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골목길 상가에서 허리벨트를 하나 사려 했는데
젊은 주인장이 가격 흥정에 영 인색해 사지않고 돌아섰었다
그런데 이곳 로도스에서 마음에 드는 벨트를 꽤 괜찮은 가격에 두 개나 장만했다
"벨트 하나 얼마예요?"
"22유로입니다"
"그럼 두 개 살테니 15 유로씩 해서 30 유로에 두 개 주세요"
한국에서 샀더라면 적어도 다섯 배는 줘야 살 수 있을 상품인 것 같았다
귀국 후 골프를 치던 어느 날 함께 라운딩 하던 일행이 내 벨트가 좋아보였는지 어디서 샀느냐고 묻는다
한국돈으로 2만원 조금 더 주고 그리스 로도스에서 샀다고 하니 내옷을 들춰가며 보고 또 봤다
품질이 괜찮다는 반증일 게다
로도스의 디아고라스 공항
디아고라스(Digoras)는
로도스섬 출신의 고대 권투선수 이름이다.
그는 제79회 올림피아 제전(기원전 464년)의 권투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올리브관을 썼을 뿐만 아니라
피티아 제전 등 주요 권투 경기에서 우승한, 불세출의 ‘주먹’이었으며 아들, 손자까지 우승했다
로도스 사람들은 섬을 통치하던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위력에 놀라고 반한 나머지
그를 헤르메스의 아들이라고 추켜세웠었다
올림픽은 남자들만 참가하는 누드 축제였기에 여자는 오직 사제 한 명 외 일절 입장할 수 없었다
디아고라스의 딸 칼리파테이라가 남장을 하고 몰래 입장해 관전하다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재판관에게 말했다
" 만약 법을 어겨도 괜찮은 여성이 있다면 아버지. 삼 형제, 아들이 총 여덟 번 올림픽에서 우승한 나 자신이다 " 라고...
이에 재판관은 경악했고 무죄를 선고했다
저녁 8시 50분, 비행 시간 약 50분 거리의 크레테 섬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