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6 유월을 기다리며
항암제 부작용으로 일주일 넘게 침대 위에서만 지내다시피 하며 비실거렸다
온몸이 천길 물속 아래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해 일어서기조차 힘들어 누워 지냈다
너무 답답하기도 하여 모처럼 산책을 나선다
아파트 뒤 청량산을 오르는데 이전에는 평소 50분이면 정상에 닿았는데
지금은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 헐떡거리니 시간이 곱절은 걸린다
걷는 내내 바라본 풍광은 몇 개월 전과 비교해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이건만
나 자신만 갑자기 너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에 심적으로 적응하지 못해 다소 혼란을 겪는다
거의 기진맥진 할 쯤 청량산 정상에 이르러 얼빠진 놈처럼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꿈쩍도 하지 못한 채 가덕도, 무학산, 마창대교 등 원거리 대상을 멍하니 응시한다
한참 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하산하려는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쓰러질 것만 같아 옆의 나무를 붙잡는다
추정컨데 항암주사 후 골수가 억제되어 나타나는 현상일 텐데
항암주사 후 2주차에 시행한 혈액검사에서 으레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모두 하한치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가덕도, 사진 상부 능선의 중앙에 제일 볼록한 봉우리 부분>
<무학산>
<마창대교>
나의 림프종은 비호지킨 림프종 중에서 여포성 타입(Follicular lymphoma)이다
진행 속도가 워낙 느린 타입이어서 나조차 제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혜부 림프절 종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진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CT촬영을 해보서야 림프종을 의심했고 림프절 생검으로 확진할 수 있었다
적어도 수 년 전부터 진행되었고 자각증상이 거의 없다보니 병기는 진행될만큼 진행되어
골수까지 침범되었고 따라서 병기는 4기이다.
CT
<척추 앞 원형의 대동맥(Aorta), 작은 화살표가 가르키는 타원형이 하대정맥(IVC)이고,
이들 주변으로 종대된 림프절들이 서로 엉겨붙어 떡처럼 되어 있다>
병기가 1기라면 국소적 방사선요법으로 완치가 가능하지만
나의 경우처럼 4기인 경우 항암제 주사 외 다른 선택이 없다
1차 항암치료를 받을 당시 주치의가 투여 약물의 부작용 관찰을 위해 들렀을 때 난 혹여 완치에 대한 기대감으로
" 재발율이 몇 퍼센트 정도 됩니까? " 라고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했다
" 거의 재발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
재발 하면 다시 치료하고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하니 나의 림프종을 만성질환처럼 여기고
평생 관리해야한다고 말했던 이유일 것이다
재발하면 조혈모세포 이식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바라건데 재발로 인해 재치료를 받기 전까지
새로운 약제가 개발되어 더 이상의 재발을 막아준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항암제 Rituximab 투여 중>
항암치료의 부작용은 여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시련을 강요하는 것 같다
하루 100mg의 고용량 스테로이드는 불면증을 야기해 수면제(졸피뎀 10mg)을 사용해도 채 2 시간도 잘 수 없고,
빈크리스틴과 항구토제(palonosetron)주사를 맞는 순간 위장관 운동은 일체 마비되어
무력장폐쇄증(paralytic ileus) 상태가 되니 온갖 종류의 변비약을 먹어도 배설은 안되고
배는 올챙이 배보다 더 팽창되어 호흡곤란을 한층 더 악화시킨다,
골수억제로 인한 감염 위험에 언제나 노심초사 해야함은 물론이고,
피곤함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만들며,
피부는 윤기를 완전히 잃고 불에 그을린 듯 거무튀튀하게 변하고 ,
모발 및 위장관 점막의 손상으로 탈모, 복통 등 죄다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하기야 항암제가 독하지 않고서야 어찌 암세포를 죽일 수 있을까만은
얼마나 독한지 한마디로 사람을 바싹 태워 말려버리려 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처지는 이런 부작용들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오롯히 받아들여야 하는 무조건적 수용의 자세를 필요로 할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시간은 내게 결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아니다
여태 나이 들어가며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 시간을 붙들어 매고싶다고 종종 생각했을 뿐인데
지금은 정반대로 시간이 물 흐르듯 막힘없이 술술 흘러가기를 진정 바란다
항암치료에 소요되는 시간인 6개월이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 만큼 빠른 속도로 지나 가기를 소망하고 소원한다
만약 저승사자가 항암치료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가로 항암치료 기간인 6개월만큼 일찍 나를 데려간다고 하면
난 얼씨구나 하고 그러겠노라고 말할 것이다
항암치료는 생각지 못한 의외의 효과도 있었다
찬 기온에 노출되면 두드러기 발생과 함께 지독한 가려움증이 생기는 한랭 알레르기로
근 삼십 년을 그렇게 시달려왔는데 근래 들어 정도가 더욱 심했졌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종종 밤잠을 설치거나 시시로 좌불안석인 상황이 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1차 항암치료 후 신기하게도 한랭 알레르기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피부 알레르기는 림프종의 한 증상이기도 한데 최근의 증상 악화는 아마 림프종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면의 시간은 소설 `토지`를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여태 다른 장편들인 태백산맥, 아리랑, 객주,지리산 등은 세 번씩 읽으면서도
왠지 `토지`만은 읽지 않고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하고 남겨두었다
그런데 림프종 진단을 받기 얼마 전 이상하게도 이제 `토지`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파크 도서에서 243,000원에 1질 20권을 구입했었다
당시 사회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인물들과 반세기에 걸친 장대한 서사를 읽는 재미가 솔솔하여
잠 못이루는 밤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게 림프종을 앓게 한 운명의 신이 불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제와서야 토지를 읽게하는
선택의 배려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ET CT
<경부, 액와, 종격동, 복부, 장골 부위의 병변 림프절들과 비장이 쌔까맣다
병변이 횡격막 한쪽에 국한되면 2기, 양쪽에 모두 있으면 3기이고, 나처럼 골수까지 암세포가 있으면 4기이다>
PET CT
<노랗게 밝게 빛나는 부분이 병변인데 종대된 비장과 대동맥 주변의 림프절이다>
내가 나의 림프종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은 PET CT 사진을 보면서 부터이다
밝은 노랑색으로 빛나는 병변 부위가 역설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는데
처음으로 내 삶의 종말이 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았다
주치의가 내게 사진을 보여주었을때 주치의에게 건넨 말은
" 바로 항암치료 시작합시다 " 였다
사실 여포성 림프종은 진행이 아주 더뎌 증상이 없는 한 치료를 서두르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하지 않았다는 말은 물론 병식(病識)이 없어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머리 속은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채워져
절망감 같은 감정은 아예 느낄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미만성 대B세포 림프종처럼 80%의 완치율을 보이는 타입도 있지만
하필이면 나의 여포성 림프종은 특성상 결국은 재발하기 십상이다
2년이 될지 10년 후가 될지 아무튼 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현재까지 재발을 막아주는 약제가 개발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다
향후 지난한 치료 과정이 설혹 살을 찢고 뼈를 깍고 피를 말리는 고통이 동반될지언정
이 모든 과정을 견디고 건강을 회복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내게는 한 가지 있다
그동안 나를 지극 정성으로 대해왔던 아내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앞으로는 내가 그 정성에 보답해야겠다는 책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이런 의지가 꺽이기보다는 장대로 하늘의 별을 따는 게 수월할 것이리라.
나의 삶은 현재 예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은 없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야구는 9회말, 골프는 18홀이 끝나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 최종결과를 알 수 없듯이
차분히 치료하며 나의 최종 결과를 기다려 보겠다
2년 동안의 유지요법이 더 필요할지라도 항암치료가 일단락되는 유월 경이면
이전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학수고대한다
일상의 회복이 재발로 인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내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영원히 지속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