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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12 지리산 빗점골

서영도 2010. 5. 5. 07:25


`지리산`이라면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연상하던 세대도 이제는 많지 않다.
지금은 국립공원  제1호로 젊은 남녀 등산객의 발길이 잦은 지리산-----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이 선혈로 얼룩졌던 시절의 애기는 50여 년 전의 청춘들이
격었던 일이지만 이제 그들에겐 까마득한 전설이며 잊혀져야할 얘기들이다.

 

그러나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전쟁이란 어휘로도 설명될 수 없는 비참함 속에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속에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웠던 허망의 정열에는 한가닥 장승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지난 은수(恩讐)를 다잡아 싣고 삭히며 한없이 흘러가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 또 흘러간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찌도 할 수 없는 25시의 인간들이 한없이 표류해 간다.
 

50여 년이 지난 오늘 여직 허공에 중음신으로 떠도는 그 원혼들이

별안간 우리 앞에 떼거리지어 나타나 눈을 부릅뜨고 다음과 같이 물어오는 것에

제대로 대답을 주어야 한다.
< 우리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과연 무엇이었는가, 조국은 우리에게 있어 과연 무엇이었는가,
오늘 우리는 조국에 있어 무엇인가 ? >
오늘의 시점에서 그들은 과연 애국청년들이었는가, 조국을 배반한 청년들이었는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꽃다운 나이에 숨져간 저 수많은 남부군과 그 지도자 이현상같은
사람을 우리 역사의 제 자리에 제대로 자리잡히게 할 날은 과연 언제일까?
물론 그 해답은 아직 이르다.

그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안존하게 제자리를 차지할 시기는 남북분단이 극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가 아닐까

 

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이현상......
그는 그가 남긴 수다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북한정권에 의해 버림받고,
지구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이루지 못할 집념 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조차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적 인물이었다.

 

난 지난 지리산 등반시 그가 평당원으로 강등된 후 최후를 마감한 곳으로 알려진
지리산 빗점골 초입의 돌너덜 위에서 발견한 붉은 얼룩이 혹시 그가 사망할 당시
그의 한맺힌 마음 속의 끊는 피가 흘러 물들인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수첩에서 기록된 한시 한 수를 옮겨본다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智異風雲堂鴻洞)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伏劍千里南州越)
언제 내 마음속에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一念向時非祖國)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끊는 피가 있다   (胸有萬甲心有血)

 

`남부군`이란 책 속에 드러난 빨치산 투쟁은 그들이 믿었던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위해서라기보다 순간순간 맞닥드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