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16. 11. 6.
시 간 : 2시간 15분
지난 시월 달에 지리산골 사과를 사러 유들골 외곡 마을에 갔다
홍옥이 끝물을 보였으니 아쉬운 대로 차선의 부사라도 먹어야겠기에 간 것이다
당시 사과농장 주인은 지금은 홍로가 나오는 시기이고 부사는 십일 월 말 경이 되어야 나온다고 했다
난 사과들 중에 한 입 베어물었을 때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인 홍옥을 최고의 맛으로 치는데
쉽게 상하고 보관이 안되는 문제로 홍옥은 시월 동안 잠간밖에는 먹을 수 없다는 점이
내게는 언제나 끌탕의 문제이다
외곡 마을까지 와서 사과만 달랑 사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기에 가벼운 산행도 곁들인다
산방기간이라고 손톱여물만 썰고 있을 나도 아니지만 더구나 내가 산불을 낼 가능성은
거북의 잔등에서 털을 찾기와도 같은 것이니 입산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8시 경 유들골 외곡 마을에 도착해 사과 농장은 나중에 들리기로 하고 산행부터 시작한다
물론 유들을 한자로 쓰면 유평(油坪)이고 외고개는 고현(孤峴)이 된다
외곡 마을 맨윗쪽에 두 채의 가옥이 있는데 혹시 산불감시원을 자처하는 주민과의 번거로움을 피해
조금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 주차한 후 발뒤축을 살짝 들다시피 하여 팥죽단지 새앙쥐 드나들 듯
슬금슬금 걸음으로 우측 집 옆으로 스며든다
만약 ` 어디 가요? `하는 소리라도 들리면 ` 요 위에 할아버지 산소 다녀올건데요 `라고 둘러댈 작정이었다
< 곱사등같은 새봉 >
입구에 설치된 cctv에 찍혔을 것이라 추쇄를 피해야한다는 생각에 초반 숭어뜀하듯 오른다
도중 소피 한번 보고 몇번 두리번 거리다 보니 어느새 동북부 능선상의 왕등재 습지에 올라선다
외곡 마을에서 왕등재 습지까지 실계곡을 따라 약 300미터의 고도를 올렸을 뿐인데
벌써 하산길로 접어드니 너무 싱거운 산행이 되버리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곳으로 돌아내려갈 만한 마땅한 곳도 없다
전날 비가 오며 고도 800 미터 이상 지역에는 눈이 내려렸지만 스패츠를 착용할 정도는 아니다
왕등재 습지에서 외고개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걷는 동안 간간히 찬바람이 불었지만
아직 살을 에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로 머리를 양어깨 속에 파묻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 산길 표시의 끈 >
외고개에 이르러 외곡 마을로 내려서는 들머리를 찾아 몇발짝 들어서니 넝쿨이 꽉 들어차
옴나위 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지리산길 지형도를 따라 도저히 길을 이을 수 없다
되돌아 나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넝쿨이 자랄 수 없는 잣나무 지역속으로 들어가니
누군가 끈으로 산길표시를 해두었기에 끈을 따라 하산한다
외고개~외곡 마을 구간 산길은 지리산길 업데이트 시 반영되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 적색선은 나의 트랙이고, 흑색선은 지리산길 540의 트랙이다 >
이날 가민전용기와 스마트폰gps 두 종류를 동시에 기록했는데 두 기기간의 트랙은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위 지형도에서 볼 수 있듯이 외고개와 외곡 마을 사이 구간에서 나의 트랙과 지리산길 540 간에 차이가 있다
추정컨데 외고개 주변에 넝쿨이 우거지며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외곡 습지를 흐르는 물길로 인해
산길의 변형이 쉽게 발생한 탓일 게다
고도 730미터에서 650미터에 이르기까지 외곡 습지의 질퍽질퍽한 구간을 통과하게 된다
외곡 습지는 1.5 km 동쪽의 왕등재 습지에 가려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48,000평방미터에 이르는 면적에
가을이면 참억새와 달뿌리풀의 흰물결이 정말 멋진 경관을 이루는 곳이다
< 참억새 >
소슬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억새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가며 서로의 몸을 비비고 섞어
마치 사랑의 행위라도 나누듯 서걱대는 양상이다
붙었다가 떨어지고 어우러졌다가 흩어지고 치켜들었다가 내리꽂으며 숨 가쁜 감창(感愴)의 소리가 일대에 낭자하고
그 소리에 땅속 두더지가 놀라고 한속을 달래던 들쥐들도 놀라 뛸 일이다
지리산에 억새가 이토록 광범위하고도 고혹적이게 펼쳐진 곳이 있었던가
< 물푸레나무 >
으악새는 억새의 다른 말일까?
원로 가수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이라는 유행가요가 있는데
첫머리가 "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로 시작된다
으악새가 구슬프게 울어대는 것을 보니 벌써 가을이 온 것 같다는 애절한 심정을 담은 가사이다
이 노래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이 노랫말을 읊조리며 상념에 빠지곤 한다
< 벌레집(충영) >
그런데 이 으악새를 두고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으악새를 경기도 방언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억새가 가을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릴 때 생기는
우는 듯한 마찰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언뜻 그럴 듯하긴 하다
< 외곡 습지 >
하지만 정작 이 노래 속의 으악새는 억새풀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이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노랫말을 쓴 배경을 설명하면서
뒷동산에 올라 보니 멀리서 `으악, 으악`하고 우는 새의 소리가 들려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 평안도 방언에서 왜가리를 으악새라고 하는데 `으악, 으악` 우는 소리에 근거한 명칭이다
이 노래의 제2절을 들어보면 으악새가 풀이 아니라 새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제2절은 " 아~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되는데
으악새와 대응되는 뜸북새가 조류이니 으악새 또한 조류인 것은 당연하다
어찌되었든 으악새가 풀이면 어떻고 새면 어떤가.....
으악새가 가을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은 것이거늘.....
< 외고개, 능선의 잘룩한 부분 >
늦가을 무렵 억새가 하늘하늘 유혹하듯 춤을 추는 외고개에 갈 때에는 여린 정 품에 안고 가서는 안된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게 어디 억새뿐이랴
빗속에 아무런 저항의 몸짓도 없이 떨어진 낙엽은 그 청정한 푸르름을 잃고
비바람에 찢기고 퇴색해 상처투성이로 정처없이 뒹굴고 ...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봄과 여름이 지나고 찬란한 단풍 빛깔 속의 아픔마저 알게 된 지금
이맘때면 왠지 가슴 속에 휑하니 찬바람이 부는 듯해 마음 한 구석이 시려오곤 한다
외로울 고, 고개 현의 孤峴 외고개를 내려서는 동안 도저히 알 길 없는 서러움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이리저리 비척거리다 쓰러지지 않으려 서둘러 외곡 마을을 내려선다
< 능선의 얼레빗 >
지리 산신령은 이맘때쯤이면 능선마루마다 얼레빗을 만들어 놓는다
허리까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빗질하여 곱게 가다듬으려 산신령님이 얼레빗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빗질이 시작되면 골골능선마다 백발을 허옇게 펼쳐놓는데 그럴때면 지리산은 온통 백설의 세상으로 변한다
그러면 난 동면할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고 그저 움츠린다
< 외곡 유평농장 >
올가을은 해가 나는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았다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사과 속에 꿀이 많이 차는데 올해는 영 그렇지 못하다고 농장주인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런데 한입 베어 물어보니 그 맛이 다른 사과와는 비교되지 않을 농익은 맛이다
과일도 사람도 적당히 농익어야 제맛이다
칼만 대면 쩍 벌어지는 수박같은 농익은 사랑이 당연 풋사랑보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