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은 `열하일기`란 불후의 연행록을 남긴 연암 박지원의 행적을 좇아 그 일부 구간을 따라가는 여행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44세가 되던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해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총 26권 10책의 연행록이다
연암의 뛰어난 관찰력, 방대한 지식, 배꼽을 잡게 하는 유머, 조선의 앞날에 대한 염려, 그리고 따스한 인간애가
잘 직조된 기행문으로 이용후생을 비롯한 북학파의 사상을 역설하고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경색된 사고방식을 풍자해 사실과 허구의 혼입이라는 복합 구성을 통해 당시 사회제도와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다
홍대용의 담헌연기(湛軒燕記), 김창엽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과 함께 조선 3대연행록으로 평가된다
연암의 사행단은 1780년 5월 27일 한양을 출발해 10월 27일 되돌아오기까지 장장 5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열하일기는 이 기간중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는 도강의 순간부터 8월 20일 열하에서 북경으로 되돌아기까지의
56일분 일기인데 1~7권은 여행 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연암은 윗초상화에서처럼 매의 눈에 몸집이 좀 뚱뚱한 거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18세기 조선의 천재였다
열하일기에서 드러난 그의 창작능력은 모든 장르를 넘나들어 단편, 정론, 시화, 논설, 우화, 일기를 종횡무진하며
자유자재의 문체를 혼용하였고 정치, 경제, 역사, 종교, 예술, 천문, 풍속, 건설, 사회, 문화 등 모든 소재를 녹여내는 용광로적 그릇이었다
열하를 다녀온 뒤 3년만에 탈고된 열하일기의 필사본이 현재 아홉 종이 남아있는데 이는 열하일기가 당시 엄청난 화제작이었음을 반증한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거나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다.
이는 상투적으로 쓰던 판에 박힌 고전적 문체와는 전혀 다른 문체였다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쓰기도 하고 거기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열하일기에 절절이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관심을 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내용의 파격성으로 인해 열하일기는 당대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가 패관잡기를 불온시하며 순정문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체반정의 서곡을 올린 중심에도 열하일기가 있었다.
정조는 직접 하교까지 내려서 박지원의 문장이 저속하다고 지적하고 문체가 나빠진 까닭이 박지원의 열하일기 탓이라며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정조의 이같은 호령에 박지원은 변명이라고 격식을 잔뜩 갖춘 속죄문을 써서 정조에게 바쳤는데
이 글이 또 보기 드문 명문이라서 정조가 또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역대왕 중 가장 지적통치자였던 정조가 천재 지식인을 벌줄 생각은 애당초 없었을지도 모른다
< 나의 경로-적색선, 연암의 경로-주황색 >
연암 일행이 연경(북경)에 이르기까지에는 무려 2개월 이상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238년이 지난 11월 2일 나를 태운 비행기는 부산을 이륙한지 고작 2시간 반만에 북경까지 데려다준다
단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윗그림에서 표기한 것처럼 북경 ~ 흥성 ~ 산해관 ~ 승덕 ~ 고북수진 ~ 북경의 이동경로를 밟았다
연암의 경로와 비교할 때 상당 부분 역방향이고 또한 그가 보았던 것들 중 일부만 선택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둘러보는 형태이다
<흥성 해산해호텔>
북경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로 흥성의 해산해호텔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7시간 이상이 소요되어 늦은 시각 투숙한다
중국땅이 워낙 넓다보니 하북성에서 요녕성으로 성 하나를 건너뛰는데 이 정도의 시간은 기본이다
흥성고성(興城古城)
후루다오(葫芦岛) 시에 있으며 남북 길이 826 m, 동서 길이 804 m, 둘레 3.2 km, 성벽 높이 8.8 m,
4개의 성문, 중앙에 종고루(鐘鼓樓)가 배치된 정방형의 성이다
서안고성, 형주고성, 평요고성과 함께 원형이 잘 보존된 4대고성으로 평가받는다
기원 990년부터 흥성으로 불렸고 명나라 시기인 1428년 영원위성(寧遠衛城)으로 개칭했으며
청나라 때에 와서는 영원주성(寧遠州省)으로, 1914년에 흥성(兴城)으로 다시 이름을 고쳤다
흥성고성은 요서(遼西)구릉지대를 뒤로 하고 남으로 발해에 임한 곳인데 예로부터 요서주랑의 요충지로
요동(遼東)지역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옛부터 명과 청의 격전지였다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으로 공포하고 자신을 칸으로 칭한 누루하치(청태조)는 1626년 요동의 중심인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는데 당시 이곳을 지키던 원숭환은 13만의 누루하치 대군에 맞서 2만의 군사로 청을 대파한다
이때 홍이(紅夷)포의 파편에 맞은 누루하치는 중상을 입고 얼마 후 사망했으니 소위 `영원대첩`이다
이듬해 1627년 누루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치(청태종)가 조선의 친명정책을 차단하기 위해 정묘호란을 일으키는 한편
다시 영원성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명의 홍이포에 눌려 실패했으니 명의 `금령대첩`이다
하지만 원숭환은 간교에 의해 대금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북경으로 소환되어 책형(살점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고 죽었는데
원숭환의 죽음은 이후 명의 내우외환과 겹쳐져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흥성고성 외부>
<흥성고성 내부>
1636년 홍타이치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다시 침략에 나선다
조선이 명을 후원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1636년 조선부터 침공하여 인조로부터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라는 치욕적 항복을 받아내고 세자를 볼모로 데려가니 병자호란이다
이후 청은 북으로 소수민족을 추스르고 남으로 요서주랑을 강공하여 산해관까지 압박한다
<조씨 패루>
연암은 1780년 7월 19일 이곳 흥성고성에 들려 조대락, 조대수 등 조(祖)씨 일가의 패루를 눈여겨 보았다
조씨는 중국 북부 지방에서 대대로 이름난 명의 장수 집안이었다
연암은 조씨 일가가 그 공적를 천추에 누리려고 돌로 정교하고 우아하게 패루를 세웠건만
결국엔 하나같이 청군에 생포되거나 투항함으로써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했다고 통탄했다
연암은 명·청의 격전지였던 요서회랑를 지나치며 전쟁을 처참하게 묘사하면서 명나라의 패망을 슬퍼한다
실학자로서 청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여한다는 생각을 견지하면서도 성리학의 여운이 짙게 배여있고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명나라를 섬기는 조선적 정서를 숨기지는 못한다
박지원의 호 연암(燕巖)은 연암협에서 유래했다
연암협은 황해도 금천의 두메산골인데 연암이 젊은 시절 팔도를 유람하던 시절 친구 백동수의 안내로 찾은 곳이다
고려 때까지는 목은 이색과 익재 이재현 등 명문장가들이 살던 곳이지만 당시에는 화전민들이 약초를 캐고 숯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연암은 이곳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기로 마음먹으며 자신의 호를 `연암`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연암이 이곳에 본격적으로 터를 잡게 된 것은 40대에 접어들면서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 역활을 한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홍국영이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동안 그 그물망이 연암에게까지 조여들게 되자
연암은 벗들의 권유로 연암협으로 숨어들었다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아 일체 벼슬도 없던 연암이 1780년 사신행렬에 포함된 것은 그동안 홍국영이 실각하며
위험이 사라지고 영조의 사위(제3녀 화평옹주와 결혼)이자 팔촌형인 박명원이 사신단의 정사로 가게되는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다
*투전판*
연암 일행이 통원보에 이르렀을 때 큰비가 내려 강을 건너지 못해 여러 날 발이 묶이는 처지가 되었다
7월 1일, 시간도 때우고 술값도 벌자고 투전판이 벌어졌는데 연암은 투전 솜씨가 서툴다며
판에 끼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이나 마시라는 핀잔마저 듣는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소리에 연암은 슬며시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옆에 앉아 투전판 구경도 하고 술도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했다
7월 2일도 역시 투전판이 벌어졌다
전날 투전판 구경으로 요령을 터득했음인지 연암이 그 판에 끼여 연거푸 다섯 판을 이겨 백여 닢을 따서
그 돈으로 술을 실컷 마셨다고 한다
연암이 " 이 정도면 항복이지 ? " 하니
일행이 " 그야 요행수로 이긴 거죠 " 하며 열을 받아서 한 판 더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연암은 일어나면서
"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는 법,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네 ! "
흥성문묘(興城文廟)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동북3성에서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문묘로 명나라 1430년 건립되었다
면적은 약 16,800 평방미터이다
대성전(大成殿)과 공자상
후루다오(葫芦岛) 시의 흥성고성에서 친황다오(秦皇岛) 시의 산해관까지는 약 2시간 거리이다
* 호곡장론(好哭場論) *
연암이 7월 23일 산해관에 이르기 보름 전인 7월 8일 그가 냉정(冷井)을 지나 산기슭을 돌아 청석령 고개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 일망무제의 요동벌이 시야에 들어오자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당하여 이렇게 독백한다
"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다가 이렇게 외친다
" 훌륭한 울음터로다 (好場論) !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可以哭矣) ! "
산해관까지 1천 2백리에 걸쳐 한 점의 산도 없이 아득히 펼쳐진 요동벌판을 대하고 터뜨린 탄성이다
이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옆의 동행자에게 연암의 장광설이 펼쳐지니 이름하여 칠정개곡론(七情開哭論)이다
슬플 때뿐만 아니라 칠정(七情) 모두가 지정(至情)에 이르러면 울음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것을 풀어버리는 데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
연암의 명시 「요동벌 새벽길」은 이때에 씌여졌다
「요동벌은 언제 끝날까? 療野何時盡
열흘을 가도 산을 못 보네 一旬不見山
말 머리에 샛별 날리고 曉星飛馬首
밭두렁에서 아침 해가 돋는다 朝日出田間」
호곡장론은 훗날 고사성어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추사 김정희의 「요동벌판」이다
「천추의 커다란 울움터라더니 千秋大哭場
재미난 그 비유 신묘도 해라 戱喩仍妙詮
갓 태어난 핏덩이 어린아이가 譬之初生兒
세상 나와 우는 것에 비유했다네 出世面啼先」
더 훗날 이육사의 「광야」로 그 맥이 이어진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연암은 산해관에 이르러 `강녀사당기`, 장수대기`, 산해관기` 3편의 명문을 남겼는데
그 글을 통해 세 군데를 구경한 것으로 보인다
맹강녀묘(孟姜女廟 Mengiangnv Temple)
맹강녀 이야기는 진나라 때 만리장성과 관련된 중국 설화이다
강녀의 성은 허씨고 이름은 맹강인데 남편 범칠랑이 만리장성 건설에 인부로 징용되어 가자 근심과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3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엄동설한이 닥쳐오자 두툼한 솜옷을 지어 보따리를 안고
몇 달에 걸쳐 만리장성에 도착하지만 남편은 어디에도 없고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너무나 원통한 맹강녀는 그 자리에 앉아 통곡을 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져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벽 아래 묻혔던 남편의 시신이 드러나게 된다
맹강녀는 남편의 뼈를 거두어 등에 지고 절망 속에 바다에 빠져죽는데 며칠 후 그녀가
빠졌던 곳에 돌이 솟아올라 망부석과 무덤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맹강녀 상
산해관(山海關 Shanhaiguan)
명나라 홍무 17년(1384)년 대장군 서달(徐達)이 다섯 겹의 성을 쌓고 산해관이라 하였다
가욕관이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라면 산해관은 동쪽 끝으로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관[關]이라는 의미이다
현재 행정적으로는 친황다오(秦皇島市)에 속하며, 동북 방면과의 육로교통의 관문이다
주변 둘레가 4 km에 이르는 사각요새로 벽의 높이는 14 m, 두께는 7 m 이다
위관[楡關]이라고도 하며 과거 군사적으로 요서회랑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즉 산해관 밖은 오랑캐의 땅이요 관문 안은 중화(中華)의 땅이었으니
산해관은 지리적 경계일 뿐아니라 민족의 경계이자 영토의 경계이고 문화의 경계선이었다
연암은 통관을 위해 산해관에서 또 한 차례 세 번째의 입국심사를 받았다
맨처음은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서, 두 번째는 심양, 그리고 세 번째로 산해관에서 이다
문무관을 따로 세우고 관문 양쪽에서 명단대로 인적사항과 소지품을 일일이 점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은 입국 및 보안 검사가 여간 까다롭지 않아 꽤 성가시게 느껴지곤 한다
고속철을 탈 때만 해도 검표는 물론이고 여권 및 보안검사를 한 번도 아니고 두 차례까지 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고속철을 탈 때 검표도 하지 않을 뿐더러 보안검사마저 없어 정말 편리하다
그러니 중국의 시스템에 적응된 중국인이 한국에 와서 고속철을 탈 때 검표도 안하고 보안검사도 없으니
아직 열차가 출발하지 않는 줄 알고 기다리다 열차를 놓치기도 하는 것이다
사진 상 우측 계단길은 문관이, 좌측 사면은 무관이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서쪽 끝 가욕관은 경사가 엄청 가팔라 준마가 아니면 오르기 힘들겠다고 느꼈었는데 산해관은 그에 비하면 평탄한 편이다
<천하제일관>
만리장성의 서쪽끝 가욕관에도 역시 천하제일관이 있다
중국 곳곳에 뭐든 천하제일이라는 글귀가 보이곤 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뼛속까지 박혀있어 그런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천하제일관` 다섯 글자는 당시의 명필 소현(蕭懸)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썼다고 한다
이 글씨를 쓰기 위해 편담(扁擔, 중국인이 지게 대신 어깨에 걸치는 막대)으로 팔뚝의 힘을 길렀다는 일화가 있다
1644년 명나라 말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위협을 받게되자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군하였는데 이미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삼계는 다시 산해관으로 들어가 상황을 지켜본다
북경을 함락시킨 이자성이 오삼계의 아버지와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잡아가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협조하게 된다
오삼계는 이자성을 물리치기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고 철옹성인 산해관 문을 청군에게 열어주었다
그해 5월 2일 북경을 정복한 청나라는 9월 19일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청제국을 세우게 된다
산해관기(山海關記)에서 연암은 위 사실을 떠올리며 성을 바위로 아무리 단단히 쌓아도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내분이 생기면
그 성곽에 화살 하나 꽂지 않아도 망하거나 승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고 언급했다
" 아아, 몽염이 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으려 하였건만 진나라를 망칠 오랑캐는 오히려 집안에서 자라났고,
서달이 이 관을 쌓아 오랑캐를 막고자 하였으나 명의 장수 오삼계는 이 관문을 열어 적을 맞아들이기에 급급하였구나.
천하가 태평한 지금, 이곳을 지나는 장사치들과 나그네들에게 공연히 비웃음만 사게 되었으니 실로 뭐라 할 말이 없다 "
이처럼 만리장성, 산해관 등은 모두 외부 오랑캐를 막고 내부 중원을 보호하고자 중국이 스스로 만든 경계선이다
현재 중국은 패권화의 야망으로 어제의 외국을 소수민족으로 편입하여 역사조차 새로 쓰고 있는데
소위 동북공정이란 이름 하에 고구려, 발해의 땅마저 과거 중국의 지방정부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산해관 광장의 낙타>
연암은 동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에 처음 낙타를 보고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 짧은 털에 머리는 말과 다름없으나 작은 눈매는 양과 같고 꼬리는 마치 소와 같다.
다닐 때는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쳐들어 마치 해오라기 같고, 걸음은 학과 같고, 소리는 거위와 같았다 "
대단한 관찰력이다
이렇듯 연암은 매의 눈으로 벽돌 굽기, 우물파기, 도르래 사용, 구들놓는 법, 굴뚝 세우기, 말치기, 말 몰기, 도로 건설, 성벾 쌓기 등
연행 동안 본 청의 앞선 문명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란 북학파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 이용(利用)이 있은 뒤에야 후생(後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롭게 사용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면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 - 「도강록」
당시 조선은 명나라의 망령에 짓눌려 있었다, 사색당쟁이 그치지 않은데다 주자의 성리학은 정책 이상의 것이었다
명나라를 섬겨서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이 판을 치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겠노라는 북벌론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연암은 탈명분(脫名分), 탈성리(脫性理), 탈북벌(脫北伐), 탈고문(脫古文), 탈조선(脫朝鮮), 탈빈곤(脫貧困),
탈봉건(脫封健), 탈과거(脫科擧) 등 정치, 사상, 문학, 제도 등 제반에 걸친 자유를 추구했다
노룡두
산해관 남쪽 6 km 지점 만리장성이 발해만과 만나는 부위에 세워진 성으로
마치 물에 잠기는 용의 모습에 비유해 노룡두라 한다
장대(將臺)
장수가 위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연암이 찾았을 때는 엄청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암이 장대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
" 장성은 북으로 내달리고 창해(발해만)는 남으로 흐르고. 동쪽으론 큰 벌판이 펼쳐있으며 서쪽으로는 산해관 안이 내려다 보였다.
오, 이 대만큼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도 다시 없으리라
한참을 바라보다가 내려오려 하는데 아무도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다,
벽돌 쌓은 층계가 높고 가팔라 내려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다 "
연암은 장대위에 올라선 사람들 모두가 내려오지 못하고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벼슬살이에 비유해
올라갈 때는 남에게 뒤질세라 서로 다투며 올라가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서면 외롭고 위태로울 뿐 아니라
물러설 한 치의 자리도 없는 낭떠러지와 같아 절망하게 된다며 벼슬아치의 최후를 경고한다
장대기(將臺記)에서 연암은
"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얼마나 큰지를 모를 것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답답한 조선땅을 벗어나 산해관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했음이다
<징해루(澄海樓)>
편액은 청 건륭제가 썼다
<정로대(靖鹵臺)>
명나라 1579년 장수 척계광에 의해 건립되었다
노룡두 끝이 바다 속으로 약 22.4 미터 들어가 있는데
당시의 건축 기술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관해정(觀海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