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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04 열하일기 2 <피서산장>

서영도 2018. 11. 8. 12:26

 

산해관을 보고 버스로 3시간 30분 거리인 청더(承德)으로 이동한다

청더는 북경에서 동북 방향으로 230 km 떨어진 하북성 동북 지역에 위치한 도시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제목으로 익숙해진 열하(熱河)의 현재 행정명이 청더이다

 

 

피서산장(避暑山庄)

 

청나라의 황금기를 구가한 세 황제 시기에 89년 동안 만들어졌는데 1703년 강희제가 첫삽을 떠고

그의 아들인 옹정제를 거쳐, 손자인 건륭제(1792년) 때 완성되었다

면적은 5.640,000 ㎡로 베이징 자금성의 8배, 이화원의 2배에 달하는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황실 정원이다

 

황제가 머물고 집무를 보던 궁전구(宫殿區), 황제가 좋아하는 명승지와 자연 모습 형태로 꾸민 원경구(苑景區),

라마교 사찰인 외팔묘의 사원구(寺院區) 등 세 구역으로 크게 나뉜다

원경구는 다시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북쪽은 산구(山區), 남동쪽은 강남 수향을 축소해 놓은 호구(湖區), 북동쪽은 평원구(平原區)인데

전체적 모습은 중국의 영토 모양을 닮았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피서산장은 피서 목적 이면에 중요한 속내가 숨어 있다

청나라는 중국의 국토 면적을 최대로 넓힌,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다

베이징은 한족을 지배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북쪽의 이민족을 견제하기에는 다소 미흡했다

 

청더는 몽골이 중국을 침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관문이기에

황제가 별궁을 지어 머무는 것에는 스스로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

특히 황제가 피서 산장에 머무르는 5~9월은 몽골의 초원이 풍요로워지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다

실제로 황제는 피서 산장에 머무는 동안 평원구와 산구에서 말을 기르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원래 이름은 `열하행궁`이었는데 강희제가 피서산장으로 편액을 달면서 피서산장이 되었다

피서산장의 `피(避)`자에서 한 획이 더 옆으로 그어져 있는 것은 중국을 하나로 천하통일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자연히 궁전구부터 보게 된다

 

 

 

 

강희와 건륭이 36경의 명칭을 시어(詩語)로 지었는데

욕심을 줄이고 공경과 정성으로 몸을 닦는 `담박경성(澹泊敬誠)`,

황제가 황후와 비빈의 문안을 받는곳을 안개처럼 자욱한 물결에 상쾌함을 느끼는 `연파치상(煙波致爽)`,

황태후가 머무는 곳을 `송학재(松鶴齋)`,

강희제가 글을 읽는 곳은 일만 개 골짜기로부터 밀려오는 솔바람의 `만학송풍(萬壑松風)` 등이다

 

 

 

 

 

 

 

담박경성전(澹泊敬诚殿)

궁전구의 핵심인 주전(主殿)이다

천정과 창문을 비롯해 전체를 녹나무로 지어서 ‘남목전(楠木殿)’이라고 부른다

중국 전통 도가의 처세 명제인 담박과 중국 전통 유가의 덕목인 성경을 융합해 지은 이름이다

황제가 정무를 관장하던 곳이다

 

 

 

 

이날 날씨가 흐리고 담박경성전을 제외한 곳들은 개방되어 있지 않아 내부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다

 

 

 

 

연경에 도착한 연암 일행은 황제가 열하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신단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진다

연경까지 오기까지만도 갖은 고생을 겪으며 왔는데 닷새 후에 열리는 황제의 만수절 행사에

반드시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서는 700리 길을 또 가야할 상황에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더 이상은 못간다고 난리법석를 칠 때 연암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능청스레

" 황제가 열하에 거둥하여 연경이 비는 바람에 몽고 기병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는군 "

이 소리에 " 아이구 이젠 우리 다 죽었다 " 하고 대소동이 일어난다

열하일기는 이런 해학으로 넘쳐난다

 

 

 

 

 

연암은 1780년 8월 9일부터 14일까지 열하에 머물렀고 6일 동안의 기록이 `태학유관록`인데

만수절 축하행사는 8월 13일에 열렸다

연암은 그동안의 천신만고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황제의 만수절을 축하러 온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엄청난 규모의 진공(進貢)행렬을 목격하게 된다

이질성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빈 소감을 만국진공기후지(萬國進貢記後識)에서

" 내 평생 기이하고 괴상한 볼거리를 열하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 이름을 알지 못했고 문자로 능히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모두 빼고 기록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

 

 

 

<강희제>

 

 

<건륭제>

 

 

<서태후>

 

피서산장의 영화는 채 160년을 넘기지 못한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 ·프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되자 함풍제는 이곳 피서산장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고

1년간 피난 생활을 하다 함풍제가 병사하면서 피서 산장의 운명도 막을 내린다

다음 정권을 잡은 자희(慈禧, 함풍제의 후궁으로 훗날 서태후로 불림)는 피서 산장을 버리고 베이징에 이화원을 건설했다

 

 

 

 

*허장성세*

 

연암이 자신을 희화한 내용이다

8월 11일 낮, 열하에 머무는 동안 연암이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

주점 안에는 요즘으로 치면 조폭 패거리들(몽고인과 위구르인)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그들의 사납게 생긴 모습을 보고 뒤늦게 잘못 들어왔다고 후회했으나 술을 시킨 뒤라 그냥 앉았다

기선 제압을 위해 작은 술잔을 가져오자 담뱃대로 확 쓸어버리고 큰 술잔을 달라고 하여 술을 몽땅 따른 뒤 원샷으로 마셔버린다

 

연암의 큰 덩치와 매같은 눈의 외양도 십분 작용했음인지 연암의 허장성세에 주점에 있던 패거리들이

  "어이쿠 어르신!!" 하며 술을 대접하고 설설 기더라는 것이다

서둘러 주점을 빠져나온 뒤 물론 박지원도 속으론 꽤 겁이 나 등에 식은 땀이 흐르더라고 토로한다

만 리 변방에서 예기치 않게 뭇오랑캐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게 되니 만약 주령(酒令)을 세운다면 마땅히

'술김에 호기를 부리다 등에서 진땀이 흘러내리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태학유관록 8월 11일)

 

 

 

 

*기상새설(欺霜賽雪)*

 

연암이 심양의 시가지를 거닐 때 문설주에 `기상새설`이란 네 글자가 붙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연암은 마음속으로 장사치들이 자기네들의 마음씨가 깨끗하기가 가을 서릿발 같고

또한 흰 눈보다 더 밝음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점포에서 그의 필법을 자랑할 겸 액자로 다는 현판에 `기상새설`을 써주니 사람들의 반응이 갑자기 시큰둥해졌다고 한다

이에 연암은 장사치들이 무식하고 멍청해 글씨가 좋은지 나쁜지도 몰라 그러는 것이라고 투덜거린다

 

다음 날  다른 거리를 지나다 점방에 들어 탁자 위 남은 종이에 `신추경상(新秋慶賞)`을 써주고

이어 칠언시의 주련까지 써주니 주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지고 연암은 술과 과일까지 대접받는다

기분이 고조된 연암은 전날 `기상새설`을 써주고 당한 수모를 씻겠다고 점포에 다는 액자로 `기상새설`을 다시 일필휘지 한다

그러자 주인이 " 저희 집은 여인네 장식품을 파는 집이지 국숫집이 아니옵니다" 라고 한다

 

아뿔사~

`기상새설'은 그 의미가 심지가 밝고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숫가루가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의미인 것이었다

연암은 시치미를 뚝 떼고 능청스레 이렇게 말한다

"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저 시험삼아 한번 써본 것이오"

저녁 숙소로 돌아와 일행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포복절도를 했다고 한다

 

아무튼 연암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 글씨 수준이 꽤 높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혹 누군가 국숫집을 개업한다면 간판을 `기상새설 국수`로 하라고 권해볼 일이다......

 

 

 

궁전구를 보고 빠져나오면 호구(湖區)로 연결된다

호구는 강남 수향을 본떠 만들었다

 

 

 

 

 

 

 

 

 

 

 

 

 

 

저멀리 불끈 솟은 경추봉(봉추산)이 보인다

 

 

 

 

호구의 북쪽 끝까지 걸어가면 열하 표지석에 이른다

 

 

 

 

열하는 이름 그대로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솟아나 얼지 않는다

청더(열하)에 온천이 많은 이유이다

 

 

 

 

 열하,

200 미터 남짓한 아주 짧은 강이다

 

 

 

평원구에 있는 몽고식 게르 숙박시설

 

*호질(虎叱)*

 

연암이 연경에 도착하기 전 옥전에 머물 때이다

7월 28일 정진사와 거리 구경을 나섰다가 생황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집을 들리게 되는데

그 집 대청 벽 족자에 세필로 씌어진 장문의 글을 발견한다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고 탄복한 연암은 그날 밤 정진사와 함께 종이와 붓을 준비해 연암은 앞부분을, 정진사는 뒷부분을 정신없이 베낀다

주인이 점잖은 조선의 두 선비가 허겁지겁 베끼는 꼴을 보고 의아해 하니 연암은 이렇게 변명한다

" 조선에 알려서 조선의 독자가 포복절도하게,

  아니 먹던 밥을 벌 날 듯 튀게 하려고,

  아니 갓 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우두둑 끊어지게 하려고 "

 

호질의 내용은

어느 고을에 학자로 존경받는 북곽 선생이라는 선비와 수절을 잘하는 부인이라 하나 성이 다른 다섯 아들을 둔 과부 동리자가 있었다
북곽 선생이 동리자의 방에 들어가 밀회를 즐기고 있는데, 과부의 아들들이 북곽 선생을 천 년 묵은 여우로 의심하여 방으로 쳐들어온다
북곽 선생은 도망치다가 똥구덩이에 빠진다
때마침 먹잇감을 찾아 마을에 내려온 범은 북곽 선생의 위선적인 모습과 인간들의 파렴치한 행동 등 부정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꾸짖고 사라진다
북곽 선생은 범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비굴한 모습으로 목숨을 애걸하다가 새벽에 일하러 나온 농부와 만나게 된다

북곽 선생은 범이 사라진 것을 알고 또다시 위선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자기변명을 한다.

 

당시 지배계층인 양반 사회의 위선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을 비판한 내용으로 연암은 애써 호질전 창작의 책임을 비켜간다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훑어본즉 정진사의 몫에 오자와 탈자가 많아 문리가 통하지 안은 탓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노라고 했다

재구성, 재창작의 정확한 범위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손질이 없었더라면 연암 문학의 영혼 격인 호질전은 없었을 것이다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

 

 

 

피서산장이 건립된 이후 강희제와 건륭제는 동북쪽 산기슭에 라마교 사찰 12개소를 창건하였는데

이들을 외팔묘(外八廟)라고 부른다

현재 부인사, 보녕사, 안원묘, 보락사, 보타종승지묘, 수미복수지묘, 수상사 등 일곱 군데만 남아 있다

 

보타종승지묘는1767년(건륭 32년) 건립을 시작하여 건륭제가 60세 되던 1771년 완공된 사묘로 외팔묘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티벳 라싸에 있는 포타라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는데 이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건륭제의 무한한 존경을 담은 곳이자 아울러 티벳과 몽고를 비롯한 변방이 자신에게 귀순해 오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여행에서 날씨 운이 없지 않다고 자부해왔는데 나의 운빨도 다했는지 이번 여행은 별로이다

시진핑 집권 후 대기오염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산해관과 흥성고성을 둘러볼 때는 뿌연 스모그 현상으로 종일 하늘이 칙칙해

사진이 잘 찍히지 않더니 오늘은 내내 빗발이 날리고 흐린 날씨가 이어진다

두터운 외투를 걸쳤지만 기온마저 쌀쌀해 왠지 신이 나지 않는다

 

 

 

 

사원 앞에 만주어, 중국어, 몽고어, 티베트어로 쓴 황제의 비문이 있다

다양한 민족의 화합을 강조한 의미이다

 

 

 

 

지난 9월 티벳을 다녀왔으니 라싸의 포타라궁을 본 지 불과 한 달이 조금 넘었다

포타라궁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데 보는 순간 일견 왜소하고 초라해 보여  포타라궁과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포타라궁은 밖에서 보는 순간 웅장함에 압도당했고 내부를 둘러보면서는 그 엄청난 유장품과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포타라궁의 홍궁을 닮은 모습이다

 

 

 

 

40여 칸의 군루(群樓)가 회랑의 형태를 이루면서 3층 건물(밖에서 보면 7층처럼 보임)을 형성하는 대홍대(大紅臺),

언뜻 복건성의 토루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법귀일전의 지붕은 청동에 금박을 입힌 것이다

 

 

 

 

 

 

 

 

 

<수미복수지묘(弥福寿之庙), 찰륜포(札什倫布)>

 

보타종승지묘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수미복수지묘가 보인다

이 사묘는 1780년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맞아 방문한 판첸라마 6세를 위해 황금기와를 얹어 화려하게 지은 전각인데

티벳 제2의 도시 시가체에 있는 타쉬룬포사를 모방하여 지었다

황제는 피서산장의 사냥터 목란위장에서 사냥 겸 군사훈련을 하며 몽골의 남하를 막고 아울러 몽골이 믿는 종교인

티벳 불교의 종교지도자 반선(판첸라마)를 초청해 곁에 묵어둠으로써 변방의 두 강국인 몽골과 티벳을 동시에 억누르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을 쓴 것이다

 

연암의 사신단이 열하를 방문했을 때 황제의 명에 따라 마지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판첸라마를 접견했던 곳이 바로 이 사묘이다

직접 본 타쉬룬포사는 또한 포타라궁과 더불어 웅장함과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멀리 떨어져 외관만 보았고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일단  규모부터 타쉬룬포사에 비할 바가 못되는 것 같다

 

*판첸라마 해프닝*

 

연암의 사신단에게 열하는 애초 일정에 없던 것이었다

목적지가 연경이었는데 마침 황제가 열하 피서산장에 있으면서 조선 사행단을 급히 열하로 불러들이는 돌발적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연암은 혹시 열하에서 바로 귀국해버리면 연경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할까봐 연경에 남아있으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한편 조선 선비로서 아무도 가보지 못한 열하를 둘러보는 첫번째 사행단이 될 거라는 기대감 속에 삼종형의 권유를 받아들여 열하에 갔다

 

열하는 연암에게 정녕 매혹적인 공간이었고 생애 가장 특이한 엿새를 보낸다

건륭제의 조선사신단에 대한 편애는 한편 예기치 못한 불운을 안겨주기도 한다

바로 티벳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접견하는 은혜를 베푼 것인데 오히려 사신단에게는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유학자가 불교, 그것도 사교에 가까운 티벳 불교의 지도자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으니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베푼 영광을 거절한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신단은

 " 머리를 조아리는 예절은 천자의 처소에서 하는 것인데 어찌 천자에 대한 예절을 번승에게 쓸 수 있겠소 "

하며 거세게 항의하는데 청의 예부에서는

" 황제도 역시 스승의 예절로 대우하는데 사신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었을 적에야 같은 예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냐 " 며

역시 물러서지 않는다

옥신각신하다 결국 현장에 가지만 판첸라마를 접견할 때 고분고분하게 예의를 표하지 않은 게 화근이 되어

엿새만에 열하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쫓기다시피 하여 연경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금산령장성(金山嶺長城, Jinshanling Changcheng)

 

 

 

명나라의 장군 척계광에 의해 1569년부터 1582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길이 10.5 km이고 북경으로부터 130 km, 청더로부터 80 km 떨어진  허베이성(河北省) 청더시  롼핑현(滦平县에 건설된 장성이다

망루 67개, 봉화 2개, 요충지 5곳인데 망루는 모두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고 사람이 생활 수 있는 공간이고

2층은 적의 감시 및 방어용으로 사용하였다

 

시야가 넓고 봉화대가 밀집되어 있으며 경관이 기괴하고 건축적으로 아름다울 뿐더러 방어체계가 견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존하는 장성 구간 중 가장 완벽한 보존상태를 자랑하며 명나라 장성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흔히 북경 인근의 팔달령장성이 제일 웅장하다면 금산령장성은 제일 아름다운 장성으로 꼽는다

 

 

 

 

 

 

 

 

 

 

 

 

 

 

 

 

 

 

 

 

<기왓조각 무늬>

 

*장관론*

 

「일신수필」편에서 연암이 7월 15일 북진(北鎭, 현재의 北寧)에 도착해 펼친 장관론이 있다

서울과 연경을 오가는 사절이나 무역상이 대개 여기서 만나는데 으레 여행의 소감을 나누게 마련이고

그때마다 어디가 장관이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일류선비(上士)는

" 중국에는 볼 것이 없노라 " 라고 한다

황제로부터 장상과 대신, 백관, 만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머리를 깍았으니(변발) 개, 돼지나 다를 바 없는 오랑캐라고 매도하는 명분론이다

이류선비(中士)는

" 볼 만한 것이 무엇일까 " 하고 되묻는다

일류선비처럼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명분론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차근차근 챙겨보는 현실론이다

청나라가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치더라도 이용후생의 도를 충실히 집행해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쓸모가 있다면

주저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긍정했다

삼류선비(下士)는 자신을 자칭하는 부류로 연암이 하고픈 의중을 말하는데 실학론이다

"  나는 비록 삼류 선비(下士)이지만 감히 말하리라

   중국의 제일 장관은 저 기왓조각에 있고, 저 똥덩어리에 있다 "

 

" 기왓조각은 천하에 버리는 물건이지만 이를 둘씩 포개면 물결무늬가 되고 넷씩 포개면 둥근고리 모양이 되니

  천하의 아름다운 무늬가 이에서 나온다, 똥은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지만 이를 밭에 내기 위해서는 아끼기를

  금싸라기처럼 여기어 말똥을 줍는자가 삼태기를 들고 말 뒤를 따라 다닌다.

  이를 정성껏 주워모으되 네모 반듯하게 쌓고 혹은 여덟 모로 혹은 여섯 모로 하여 누각이나 돈대의 모양을 이루니

  이는 곧 똥무더기를 모아 모든 규모가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성지, 궁실, 누대, 목축 따위만을 중국의 장관이라 할 것인가 "

 

당시 조선이 청문명을 거부하는 이유는 청이 북방의 유목민이고 그들의 문화는 오랑캐라는 생각에

중화문명의 한족 명나라가 멸망했으니 이제 중화문명은 조선이 지킨다는 소중화주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연암은 중화주의의 명분은 건드리지 않은 채 `이용후생`의 논점을 피력한다

" 정말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의 전해오는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의 유치한 습속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부터 공업, 상업 등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다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열을 배울 때 우리는 백을 배워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

  우리 백성들이 몽둥이를 만들어두었다가 저들의 견고한 갑옷과 무기를 두들길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중국에는 볼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오전 피서산장, 오후 금산령장성을 구경하고 숙소가 있는 고북수진으로 간다

 

 

 

고북수진(古北水鎭, Gubeishuizhen, Beijing Wtown)

 

 

북경 시내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원래 시골의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부동산 개발업체에서 중국 강남수향의 대표적인 물의 마을인

오진의 모습과 화북 지역의 건축 양식을 융합해 만든 민속마을이다

2010년부터 조성돼 2014년 개장되었다는데 개발비용만 45억위안(7천700억원), 총면적 9㎢로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한다

 

동양의 베네치아 같은 수향마을과 한국 민속촌 느낌이 반반 섞인 분위기이다

만리장성에서도 험하기로 알려진 사마대장성이 지척의 거리에 있어 케이블카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옛 중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아기자기한 가옥들,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잔잔한 물길이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여태 고북수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오는 길에 도로가 막혀 지체되는 바람에 늦은 밤시각 고북수진에 도착했으니 처음 접한 고북수진의 모습은 야경이었다

그동안 몰랐기에 더욱 새롭고 중국이면서도 전혀 중국같지 않은 이국적 분위기에 취해 발길이 정처없이 떠돌았다

시계를 보고서야 11시가 가까워진 것을 알고 숙소로 돌아왔으니 근 3시간을 혼자 밤길을 배회했던 것이다

청더와 고북수진,

두 도시 모두 피서와 온천을 즐기며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란 걸 확인한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너무나 고혹적이어서 정신줄을 반쯤 놓아버린 고북수진의 야경이었다

언어 능력의 한계로 이날 저녁 내가 보고 느낀 감정을 말과 글로는 담아낼 수가 없다

『주역』「계사전」에 `글이란 하고 싶은 말을 다 나타내지 못하고, 말이란 원래의 생각을 모두 나타내지 못한다`라고 했다

어차피 글로 표현할 수 없으니 사진으로나마 야경의 아름다움을 전하려 한다

그런데 연암은 나의 의중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것인지  `그림으로도 뜻을 다할 수 없다(圖不盡意)`고 했다

그래도 글, 말, 그림 세 가지중에는 그림이 제일 나은 방법인 것 같다........

 

 

 

 

<고북수진 입구 및 매표소>

 

 

 

 

 

 

 

 

 

 

 

 

 

 

 

 

 

 

 

 

 

 

멀리 보이는 산 능선상의 불빛은 사마대장성이다

 

 

 

 

 

 

 

 

 

 

 

 

 

경극 공연

 

 

 

 

 

 

 

 

 

 

 

 

 

 

 

 

 

 

 

 

 

 

 

 

 

 

 

 

 

 

 고북수진 호텔

 

 

 

몽환적 풍경에 취한 흥분감,

황홀한 야경의 유혹,

최고급 5성급 호텔의 안락함,

이런 밤을 홀로 새운다면 이는 야경과 호텔에 대한 모독이요 용서받지 못할 배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