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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호식품, 고로쇠와 녹차

서영도 2022. 1. 26. 15:50

 

 

창원 지역신문에 하동 화개면에서 고로쇠 채취가 시작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를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요며칠 날씨가 따뜻해지며 오랜 세월 반복된 습성으로 인해

이맘때면 자연스레 일어나는 생각때문인지 오늘따라 고로쇠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고로쇠는 젊은 시절 지리산 등산을 시작한 이후부터 한해도 빠지지 않고 녹차와 더불어

매년 마셔왔는데 오늘따라 고로쇠 생각이 나며 그럴 때마다 입안에 군침이 도는 듯하다

 

내가 고로쇠를 처음 접한 건 약 30여년 전 지리산행 때였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여전히

일반등산로를 따르지 않고 지도 한 장에 의거해 산을 오르던 어느 날, 곳곳의 나무 줄기가

아침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빤짝거리는 신기한 장관이 펼쳐져 있었는데

마치 숲속 요정들이 아침 일찍 그들의 놀이터에 나타난 나를 놀리려는듯 거울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고로쇠 나무 줄기마다 매달린 비닐 봉지가 햇빛을 반사하며 그렇게 보였는데

비닐 봉지들마다 고로쇠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중 한 봉지를 풀어 마셔보니 밤새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탓에 얼음장만큼 차가웠지만

제때 주인이 거둬가지 않아 며칠간 방치된 탓에 당도가 높아져 달기가 꿀맛과 다름없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산행 열기로 마침 갈증이 날 즈음이었기에 시원하기 그지없고 달달한 고로쇠는

서리질의 오묘한 맛까지 더해져 이 세상에 비교할 수 없는 환상적 맛이었다

배낭속에 준비해간 물통을 몽땅 비우고 고로쇠로 가득 채워 이날은 서리한 물을 산행 내내 달게 마셨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고로쇠나무에서 채취자의 집 마당 저장탱크까지 바로 호스를 연결해 채취하니

옛날처럼 산행하며 서리질하는 맛이 없어진 게 나에겐 무척 아쉬운 점이다

그리고 요즘은 굳이 지리산을 찾지 않아도 대도시 백화점에서조차 페트병에 담긴 고로쇠를 구입해 마실 수 있지만

그날 이후 매년 초봄경이면  난 지리산를 찾아 지리산행도 하면서 고로쇠 물도 구입해 마신다

 

고로쇠처럼 녹차 또한 지리산행 때의 강렬했던 기억때문이다

지리산에는 영신대, 문수대, 묘향대, 향적대, 무착대, 금강대, 서산대 등의 

지리산의 기가 응축된 곳으로 알려진 5臺, 7臺 등의 명당터가 있다

오래 전 삼도봉, 불무장등을 거쳐 이들 중 하나인 무착대 토굴을 찾았을 때였다

 

홀로 수행중이던 스님은 나의 갑작스런 방문을 마다하지 않고 녹차 한잔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토굴 방안은 스님 혼자 기거하기에도 좁을 정도였는데 천장도 너무 낮아 바로 서지 못하고 허리를 굽혀야했다

한겨울 심설 산행으로 약간 한기를 느끼던 중에 장작 군불에 데워진  토굴 방바닥이

얼마나 뜨끈뜨끈하던지 추위에 오그라붙었던 불알이 툭 늘어지며 방바닥을 쿵하고 울릴 정도였다

 

스님은 돌샘에서 우러나는 石間水를 아궁이 장작불로 끓인 후 가지런히 정돈된 다상을 펼치고 차를 우렸다

아주 연한 녹색빛의 찻물이 담긴 찻잔을 받아 입에 대는 순간 은은한 향기가 느껴지고

차맛의 90 퍼센트는 물맛이 좌우한다고 하는데 무착대의 돌샘 물맛이 좋아서인지

한 모금 마셔보니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는 맛이 이전에 마셔보았던 녹차와는 차원이 다른 게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었다

그날 이후 난 녹차에 인이 박혔고 고로쇠처럼 나의 최애 기호식품의 하나가 되었다

 

매년 새해 들어 우수를 전후해 햇차가 나올 무렵이면 잘 제다된 야생의 수제 녹차를 구하기 위해

쌍계사 주변 화개골의 다원, 제다를 찾아가는데 덖음차는 찻잎의 채취 시기, 덖음 횟수,

덖는 불의 온도 등에 따라 차의 맛이 천차만별이기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하루종일 시음하는 재미도 나에겐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시음 후 일년치 햇차를 구해 차안에 가득 싣고 돌아올 때의 기분은

아마 풍년 들어 이를 수확하는  농부의 심정에 못지 않을 것이다

 

녹차는 일년치를 구해 두고두고 마실 수 있지만 고로쇠 물은 보관상의 문제로 이 시기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

너무나 강렬했던 자극의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고로쇠를 마셔보고싶다는 생각이 이렇듯 불쑥불쑥 일어나니 아무래도 조만간

고로쇠가 보다 빨리 나오기 시작하는 지리산 남쪽 지방을 찾아 지리산행도 할겸 한 차례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