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60831 운명이 묶어둔 발걸음

서영도 2026. 8. 31. 17:09

 
요즘 네팔의 대규모 홍수와 관련 기사가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랑탕 리룽(Langtang Lirung) 북사면 5,200m 지점의 빙하와 기반암이
붕괴되며 시작되었다
무려 1,200m 아래로 쏟아져 내린 충격은 규모 5.2의 지진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빙하, 암석, 물이 한꺼번에 렌데계곡로 터져 나오며 참혹한 토석류의 홍수가 일어난 것이다
 
홍수 사고의 위치가 궁금해 지도를 찾아보니 홍수가 덮친 계곡은
네팔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파상 라무(Pasang Lhamu Sherpa)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파상 라무 하이웨이`가 지나는 곳이었다
이 도로는 인도 힌두교인들이 숭배하는 쉬바신의 거처인 티벳의 카일라스와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가 명상하던 중 그의 마음에서 창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마나사로바 호수로 향하는 성지순례길이다
동시에 네팔의 랑탕 지역을 찾는 트레커들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참사 피해자 중 외지인의 비중이 유독 높았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 파상라무 하이웨이 구간 :직사각형>
 
작년 10월 티벳 카일라스 트레킹을 다녀온 후,
나는 다음 트레킹 여정으로 랑탕 트레킹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의봉 동기회 단톡방에도 선선히 내비쳤던 터라
홍수의 위치를 지도에서 확인하는 순간 난 뜨거운 불에라도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홍수 동영상 속 풍경은 차마 눈 두고 보기 힘들 만큼 참담했다
랑탕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루베시 마을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 되어 있었고
계곡 양편의 마을을 잇는 다리가 급류에 파괴되어 힘없이 떠내려가는 장면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샤브루베시의 홍수 전 위성사진>
사진 우측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이 랑탕계곡이다

<샤브루베시의 홍수 후 위성사진>

<랑탕계곡과 홍수 발생 계곡(린데,보테코시, 트리슐리) >
 
보통 랑탕 트레킹은 카트만두 공항에서 샤브루베시(Syabru Besi) 까지
차량으로 약 7시간을 이동한 뒤 시작된다
여정의 최종 목적지인 강진리와 체쿄리는 모두 이번 붕괴의 시발점인 랑탕 리룽과 맞닿아 있다
랑탕 리룽의 북사면 산사태가 이번 홍수를 불렀다면
그 남사면이 바로 트레커들이 향하는 목적지인 셈이다.
 
만약 나의 지병이 재발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랑탕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필 이 시기에 파상 라무 도로를 지나고 있었거나
샤브루베시의 어느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 역시 그 차가운 사망자나 실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한 소름이 돋는다.
 
이번 재앙으로 카트만두와 샤브루베시를 잇는 도로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다
네팔의 열악한 인프라를 고려할 때 복구에 몇 년이 걸릴지 기약이 없다
앞으로 수년이 지나 도로가 뚫리고, 아직 10개월이 남은 나의 치료가 다 끝난다 한들,
그때는 노화로 인한 체력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이제 랑탕은 쉽게 닿을 수 없는 먼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운명의 신은 아직 나를 거둘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육체적 활동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질병을 슬그머니 얹어 내 발목을 묶어둠으로써,
그 참혹한 재난의 현장에 서지 않도록 미리 나를 보호해준 것이 아닐까
비록 조금은 억지스런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신비로운 운명의 배려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도,
지금 내가 견뎌내야 할 힘겨운 치료 과정을 버텨낼 긍정의 마중물이 되기에
나는 기꺼이 이렇게 믿으며 운명의 배려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