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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2 그리스5<아라호바,델포이>

서영도 2022. 6. 10. 16:25

♣ 델포이 박물관

 

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델피는 신탁의 도시였다

각 도시 국가는 신탁을 받기 위해, 그리고 신탁에 감사하는 뜻으로 최고의 기념물과 보물들을 봉헌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대부분 약탈되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들 중 일부이다

 

클레오비스외 비톤(Kleobis and Biton, the `Twins` of Argos)

 

남자 동상은 쿠로스(Kouros), 여자 동상은 코레(Kore)라 한다

기원전 580년 경 아르고스의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의 석상으로

왼쪽 다리는 약간 앞으로 나오고 두 손은 허벅지 옆에 모아 붙인 자세로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는 아르고스에 있는 헤라  신전의 여사제 키디페의 아들인데

비록 가난하지만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였다.
하루는 어머니 키디페가 헤라 여신께 제물을 바치기 위해 신전으로 가야 했는데

수레를 끌어야 할 황소 두 마리가 늦도록 들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클레오비스와 비톤은 어머니가 제사에 늦지 않도록 자신들이 소 대신 멍에를 쓰고

20리나 되는 길을 수레를 끌고 갔다

신전에 도착한 두 형제는 무거운 수레를 끌고 먼 길을 온 터라 지쳐서 잠이 들었다

카디페는 잠든 두 아들을 보며 이처럼 효성스런 아들을 갖게 된 것을 헤라 여신께 감사드리고

그들에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두 아들은 더 이상 깨어나지 않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빠르고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신들이 두 형제에게 내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두 형제를 기리기 위해 델포이 사람들이 형제의 동상을 만들어 아폴로 신전에 바쳤다고한다

 

이 이야기는 헤르도투스의 <역사> 31장에 나오는데

고대 그리스 7현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솔론은

클레오비스 형제를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꼽았다.

솔론이 리디아 왕이며 최고의 갑부로 소문난 크로이소스를 방문하였을 때,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자신보다 복이 많은 사람을 보았냐고 물었다.

솔론이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게 몸을 바친 아테네 사람 텔로스를 꼽자,

크로이소스는 다시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을 보았냐고 물었다.

이에 솔론은 지극한 효성으로 뭇사람들의 칭송을 누리다 고통 없이 숨진 클레오비스 형제를 꼽았다

이에 크리이소스는 솔론을 어리석은 자라고 치부하고 돌려보냈다

얼마 후 페르시아의 왕 키로스와 벌인 전쟁에서 패해 화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서야

크라이소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솔론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고 한다

 

솔론은 현재의 행복에 젖어 자만하지 말고 항시 겸손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부를 가졌더라도 비참한 죽음을 맞을 수 있기에 솔론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한 것이다

 

 

아폴론 황금 신상(Torso of the chryselephantine of Apollo)

 

인간이 아닌 신을 직접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봉헌물로 금과 상아로 만든 조각상이다

 

아르테미스 황금 신상(Torso of the Chryselephantine of Artemis)

 

낙소스의 스핑크스(Sphinx of Naxos)

 

기원전 570~560년 제작

낙소스섬의 대리석을 깎아 낙소스 인들이 바친 물건으로, 원래는 높이 12m의 높은 원주기둥 위에 있었다.

스핑크스 밑에는 글귀가 있는데 바로 낙소스 인에게 주어진 특권에 관한 것이다.

낙소스인들은 델포이가 지어질 때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델포이는 낙소스 인들에게 그 어떤 폴리스보다 먼저 피티아의 예언을 받을 수 있도록 특권을 주었다.

 

참고로 보통 스핑크스라 하면 대부분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원래 스핑크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시프노스 보물창고(Treasury of Siphnos)의 박공면과 프리즈

 

기원전 560년 경 키클라데스의 부유한 섬나라인 시프노스Siphnos가 지어 아폴론 신에게 봉헌했던

시프니안 보물(The Treasury of the Siphnians) 창고의 조각이다

윗쪽 박공면은 아폴론과 헤라클레스의 싸움을 중재하는 제우스,

아랫쪽 프리즈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응원하는 신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퀼릭스(White kylix with a drawing of Apollo)

 

기원전 480~470년 델피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화가 피스토크세노스(Pistoxenos)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양쪽 손잡이가 달린 연회용 술잔(kylix)으로 포도주를 다 마시면 바닥의 그림이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아폴론 신이 도금양(myrtle) 나뭇가지로 엮은 관을 쓰고 왼손에 악기 리라를 들고 왼쪽 어깨에 히마티온을 걸치고

사자 다리의 스툴에 앉아 술을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지켜보고 있는 까마귀는 아폴론 신의 상징이다

 

 

안티노스 동상(the Statue of Antinoos)

`우울한 로마인(Melancholy Roman)`라고도 불린다

 

안티노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총애한 동성 애인으로 황제가 늘 곁에 두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 취향에 푹 빠졌는데 성인 남성의 소년애(小年愛)도 그리스 문화였다

당시의 그리스 남자들은 미소년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사랑의 형태라고 믿었고

여자는 열등한 존재이므로 그들과는 오직 자식을 낳기 위해서만 잠자리를 같이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30년 하드리아누스의 나일강 유람 때 동행했는데 안티노스가 나일강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

소년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황제를 위해 자신을 인신공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50대 중반의 하드리아누스는 건강이 심각한 상태였기에 안티노스는 연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고

콧수염이 나기 시작해 황제를 떠날 때가 되었을 뿐더러 황제를 위해 죽으면 자신의 나이만큼 그가 더 살게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황제의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동성 애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영토 내의 도시와 신전 곳곳에

안티노스의 동상을 만들게 하였으며 신으로 숭배되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채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슬픔에 잠긴 듯하다

 

 

전차를 모는 전사의 청동상(Charioteer of Delphi)

 

기원전 470년 경 시칠리아 군주가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봉헌한 키 180cm 실물 크기의 청동상이다

얼굴 표정은 승리의 벅찬 순간임에도 감정 표출을 자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대중을 바라보는 듯하다

드레스단 묘사와 섬세한 발 근육, 말 고삐를 잡은 손과 팔 근육 묘사가 매우 섬세하게 묘사된 작품이다

스페인의 한 의상 디자이너는 1907년에 이 청동상의 의상에서 영감을 받아 델포이 가운이라는 옷을 디자인해

유럽 전역에 유행시킨 적이 있었다

 

4마리의 청동 말은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고

1203년 십자군 전쟁시 베네치아가 가져가 현재 베네치아 산마르코 박물관에 있다

 

옷주름, 머리카락 한올조차 그 처리가 아주 섬세하다

그리고 아주 잘 생겼다

지금 태어났더라면 톱배우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인 것 같다.....

 

눈동자, 속눈썹까지

고대 그리스 장인들이 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진짜 사람같이 표현할수 있었을지....

 

 

 

 

♣ 델포이 신전

 

 

그리스 중부의 포키스 지방, 코린트 만에서 약 9.65㎞쯤 떨어진 파르나소스 산의 험준한 단애(斷崖) 중턱에 있다

델포이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신탁으로 유명했고 근처 파르나소스산에 자리잡은 요충지이기도 했다.

델포이의 더 오래된 이름은 푸톤이라고 한다.

신화에서 델포이에 살았다는 거대한 이무기 피톤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8~6세기 폴리스 성립기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과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 중심지였다

 

 

 

아폴로 신전 모형도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델포이는 무엇보다 신탁으로 유명했다.

전국의 폴리스에서 온 수많은 왕과 현자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신들의 뜻을 알기 위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몰려들었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들은 곳도 이곳이다

 

신탁을 언제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폴론 신전이 열린 동안 신탁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고 한다.

최초에는 매년 1회씩 신탁을 받았으나 훗날엔 매달 한 번씩 신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신탁을 받기 위해선 패리노스라는 세금을 내야 했다.

 

옴파로스

 

당시 그리스인들은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어느 날 문뜩 제우스는 세상의 중심이 어딘지 궁금해져 세상의 양쪽 끝에 서서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보냈다.

양쪽 끝에서 출발한 독수리가 서로 마주친 장소가 바로 델포이였다고 한다.

제우스는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옴팔로스(세계의 중심)라는 원뿔형 석상을 세웠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옴팔로스를 무척이나 중요한 종교적 상징으로 여겼다.

 

신화에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제거하고 왕권을 빼았을 때

우라노스는 "너 또한 자식에게 왕좌를 빼앗기리라"라고 예언한다.

이 예언 때문에 크로노스는 태어난 자식들을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린다.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는 남편에게 반발하여 여섯 번째 아이 제우스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 가이아에게 지혜를 구한다.

가이아의 조언에 따라, 레아는 크레타 섬 산속 동굴 안에서 비밀리에 아이를 낳는다.

한편, 남편 크로노스에게는 포대에 싼 돌덩이를 건네주는데 크로노스는 그걸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해서 바로 삼켜버린다. 그러하여 목숨을 건진 아들이 바로 제우스이다

성장한 제우스는 가이아가 건네준 구토제를 크로노스가 삼키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크로노스는 삼킨 돌을 토한 후 차례로 포세이돈,하데스, 헤라,데메트라, 헤스티아를 토하여 형제들이 되살아난다

옴파로스는 이때 토한 돌이라고 한다

 

페루의 쿠스코Cusco 역시 세계의 중심, 배꼽이란 뜻으로 잉카인들이 생각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중심은 한 곳만 있을진대 민족, 나라마다 모두 자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니 배꼽도 여러 개인지....

 

 

아테네 보물창고

 

기원전 490~480년, 도리아식

기원전 490년 2차 페르시아 전쟁이었던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해 바쳐진 것이다

건물의 메토프에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업적과 그리스 최고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노역과

아마존과의 전투가 부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유적지 입구에서 신전까지 길이 갈지자로 이어지는데 이 신성한 길 주변으로

각 도시 국가들의 보물 창고가 있었다

보물창고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둔 금고이다.

각지에서 모인 폴리스들은 신탁을 먼저 받기 위해, 신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보물 창고(Treasury)를 지었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현재 델포이 박물관에 있다

 

 

월계관

피티아 제전의 우승자에게 주어졌다

반면 올림피아 제전의 우승자에게는 올리브관이 주어졌다

 

아테네 보물창고의 모형도

 

청동 기둥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무기를 녹여 만들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약탈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가 히포드럼 광장에 세웠다

따라서 진품은 현재 이스탄불에 있고 현재 여기 델포이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원래는 뱀 3마리가 빙빙 꼬여 올라가고 머리 3개 위에 피티아의 상징인 삼발이 솥과 황금잔이 올려진 기둥이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

 

현존하는 신전은 기원전 4세기 도리스 양식으로 건축했는데 전실ㆍ후실ㆍ신실로 총 3개 방으로 나뉘었다

원래 신전은 길이 60m, 폭 23m로 38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지붕이 덮혀 있었지만

현재 6개의 기둥만 남아있다

 

높이 2,475m의 파르나소스 산의 남쪽 단애 중턱에 위치했다

성역의 배경을 이루는 하연 절벽을 `파이드리아데스`라고 부르는데 `빛나는 바위`의 의미이다

내리쬐는 햇빛이 이곳 절벽에 반사되어 성소를 환하게 밝힌다

절벽은 움푹 파여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데 서쪽 절벽은 `로디니` 즉 `장미빛` 바위라 하고

동쪽 절벽은 `플레부코스` 즉 `불타는 바위`라고 하는데 두 절벽이 태양의 기를 한껏 모아 델포이에 쏟아붓는 형태이다

우주의 기가 모이는 지형으로 빛의 신 아폴론의 성지다운 풍수요 배치이다

 

신탁을 받는 과정은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먼저 성역에 들어가기 전에 카스탈리아 샘(Kastalian Spring)에서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했다.

그다음 패리노스를 지불하고 양 같은 희생 제물을 바친 뒤 예언 받고 싶은 사항을 석판 따위에 적어서 신관에게 건냈다.

예언은 아무나 의뢰할 수 없었고 보통 국가 차원에서 대표자를 보내어

나라의 중대한 결정사항을 물어는 것이 대부분이였다.

 

 

신실의 제일 안쪽에 아폴론 신의 여사제이자 예언자인 피티아가 다리가 3개 달린 삼발이 솥 위에 앉아 신탁을 했다고 한다

예언이 시작되는 신실 안쪽은 아디톤(Adyton)이라 하여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었다.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피티아 여사제, 단 한 사람뿐이었다.

 

피티아가 신탁의 결과를 받아 말하면 아디톤 밖에서 신관이 듣고 받아 적어 해석한 뒤

질문을 의뢰한 사람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피티아의 예언은 아주 난해하고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애매했는지는 영어 단어 중에 `Delphic`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수수께끼같이 애매하다는 뜻이다

 

 

여사제 피티아의 예언은 당대의 묘사를 보면 피티아가 하는 말을 신탁 요청자는 직접 들을 수 없고,

피티아를 보좌하는 남신관들이 피티아의 말을 듣고 기록하여 의뢰자에게 전달해주는 형식이었다.

피티아의 예언을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설은 바로 '가스로 인한 환각'이다.

피티아 여사제의 발 밑으로는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이 유황 가스이어서 피티아가 맡고 환각에 취해 예언했다는 것이다

피티아가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진 채로 하는 말을 보좌 남신관들이 듣고 글로 적어주었을 테니

당연히 내용이 난잡하고 의미도 해석하기 난해했을 것이다.

 

델포이 근방에 있는 도시가 바로 영화 300으로 유명한 테르모필레인데,

테르모필레는 예부터 유황온천이 유명한 곳이였다.

테르모필레란 지명부터가 '뜨거운 입구'란 뜻인데, 유황온천이 많은 지역으로 가는 입구였기에 붙은 지명이다.

 

 

극장

기원전 4세기에 건축되었고 35단이다

여름이면 연극제가 열리고 있다

 

 

델포이의 신탁은 개인의 불행한 미래를 예견해주고 이를 회피해 나갈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도록 해주는 

인생의 길라잡이 역할도 했지만 개인이 아무리 피해 달아나려 해도 결국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신탁도 있었으니대표적인 예가 오이디푸스의 신탁이다. 

 

오이디푸스(Oedipus)는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의 아들로 자랐다.

성장한 후 연회 자리에서 어떤 취객에게 오이디푸스가 왕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을 듣게 된다.

그는 왕과 왕비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들이 부인하자 마음이 놓였지만,

불안한 마음에 델포이를 찾아 신탁을 구한다.

그는 비극적인 운명의 신탁이 자신에게 내려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고,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의 친부모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자식의 이런 운명을 알고

그를 낳자마자 들판에 버렸고, 그는 폴뤼보스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저주 받은 운명을 알게 되면서 그 운명을 회피하기 위해 양부모의 곁을 떠나 세상을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선한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는 방랑의 과정에서 우연히 길 다툼을 하다가 누군지도 모르고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이어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를 위기에서 구한 그는 이 공로로 테베의 왕이 되어

홀로 된 왕비인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테베의 왕을 살해한 자를 잡아 정의를 세우겠다는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그 살인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 딸과 두 아들을 낳아준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였다는 참담한 전말을 모두 알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세상을 떠돌다 죽게 된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는 불굴의 인간 정신을 보여주었다. 

 

 

스타디온(Stadion)

 

기원전 3세기 건축되었고 길이 178m, 폭 26m, 수용 인원 6,000명이다

피톤을 물리친 아폴론은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여 피티아 제전(Pythia games)이 열렸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었던 것을 2세기경에 그리스의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자비를 들여 발굴하고 재건축했다

 

BC 590년에 처음 열린 경기는 전차경주를 비롯하여 올림피아 제전에서 겨루던 여러 종목이 추가되면서 

그리스 4대 제전(올림피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피티아 제전)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른 제전과 달리 특이했던 점은 피티아 제전에서는 음악 경연이 함께 벌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어졌다

 

 

 

톨로스(Tholos of Delphi,The tholos of Athena Pronaia)

 

원형의 건축물을 톨로스라 하는데

기원전 380~370에 건축되었고 이테나 여신을 모시던 성역으로 20개의 도리아식 기둥,

`프로나이아`는 `신전 앞에`의 의미로 델포이의 주신 아폴론 앞에 있는 신전이란 뜻이다

 

대리석을 채굴하던 채석장이어서 `대리석`이라는 의미의 마르마리아Marmari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스 유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그리스를 소개하는 화보나 책자에 꼭 나오는 원형건물이다

 

아라호바 마을

 

델피 신전이 지근 거리에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 산간 마을로서

겨울철이면 인근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시계탑

 

아라호바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이기도 하다

시계탑 옆 이곳에서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나누며 사랑을 약속했다

 

 

아라호바는 산비탈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마을로서 일종의 달동네 모습과도 닮았다

마을을 관통하는 중앙 도로도 좁아 대형차가 교행하기조차 수월하지 않을 정도이다

시간적 여유로 마을을 한 시간 남짓 배회하다 길가에 놓인 이 교회 안내판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려 교회를 바라보니 가파른 계단 끄트머리 저멀리 하늘을 배경으로 오도카니 서있는 게

한 차례 등산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어 보였다

 

그리스의 5월말 날씨는 한낮 기온이 한국의 초여름과 진배없어 교회를 다녀오려면

땀깨나 쏟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잠깐 망설였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니 한번 올라가보자고 마음 먹었다

힘겹게 올라 넓은 교회 마당에 들어서니 조망이 훤하게 트인 게 일망무제 그 자체였다

마당 한켠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서서 땀을 들이며 한참을 아라호바 마을을 내려보았다

 

 

 

 

점식 식사 후 아라호바를 떠나 메테오라를 보기 위해 칼람바카로 이동 중

테르모필레(Thermophylae)에 들린다

`테르모`는 `뜨거운`의 뜻이고 `필레`는 `입구`의 뜻으로 이 지역의 유황온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 북부에서 남부 지역으로 이동 시 반드시 거쳐야하는 교통적 요충지였는데

3차 페르시아 전쟁 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 벌어진 전쟁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의 동상(The Statue of Leonidas I)

 

테르모필레는 기원전 480년 3차 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중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최정예 스파르타 전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에 맞서

3일간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한 곳이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100만의 군사를 모아 그리스를 침공했다

10년 전 부왕 다리우스의 마라톤 전투 패배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진격을 위한 관문인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페르시아는 " 우리가 가진 화살이 너무 많아 태양도 덮을 정도이다 "라고 위협했다

스파르타는 " 그렇다면 우리는 그늘 속에서 싸울 수 있다 "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샛길을 누설한 그리스인의 배신으로 스파르타 군 300명, 동맹군 700명이 전멸했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스펙터클 영화가  <300>이다

 

`와서 가져가라(Molon Labe)`

레오니다스 동상 아래 적힌 글로 스파르타 전사의 구호로서

현재 그리스 기념품 가게의 티셔츠에 자주 씌여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는 페르시아에 대항해 한 말로서 유명한데

스파르타의 용맹성과 자존심을 잘 나타낸다

 

레오니다스 동상을 한참 바라보며

`살아서 그리스를 다스리느니 죽어서 자유를 지키겠다`

`방패를 들고 돌아오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그 위에 누워서 돌아오리라` 한 그의 결기찬 외침을 생각하니

서슬이 시퍼렇게 느껴지는 게 오월의 그리스 땡볕 열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서늘한 기분마저 든다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2년부터 480년까지 동서양 문명이 충돌한 총 3차례의 전쟁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전쟁이다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모태이자 시원이다

만약 3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했다면 유럽 문명은 아시아 문명으로 대체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가 모두 승리하며 유럽 문명을 지켜냈다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모태이고 최후의 보루였었다

 

간략하면

1차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2년으로 페르시아 군대가 폭풍을 만나 난파되며 흐지부지 되었고

2차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 밀티아데스의 지략으로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의 침략을 저지했다

3차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그리스가 중과부적으로 졌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다리우스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왕의 페르시아 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도 역시 페르시아가 대패하며 페르시아 전쟁은 끝을 맺는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델로스 동맹을 맺는다

동맹 유지에 필요한 자금의 금고를 처음에는 에게 해의 섬 델로스에 두었는데

이후 안전상의 이유로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는데 아테네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가

이 자금을 유용해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는데 소비해버리자 델로스 동맹에 균열이 생긴다

스파르타 주축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새로 결성되어 아테네 주축의 델로스 동맹과 싸우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며 그리스 최고의 문명국가였던 아테네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잦은 분쟁으로 도시 국가들의 국력이 약해지는 사이에 북쪽에서 세력을 키운 마케도니아가 남하해

기원전 338년 그리스를 통일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이 된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동방원정에 나서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그동안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당한

복수를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갑작스런 사망 후 세력 확장이 중단되며

기원전 168년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마케도니아가 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마저

기원전 31년 망하며 그리스는 완전히 멸망한다

 

 

참고로

마라톤의 유래가 2차 페르시아 전쟁의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가 승리했음을

전령이 42km를 달려 아테네에 소식을 전했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스포츠 정신에 전쟁 이야기는 부합되지 않으니 미화된 것이다

 

실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아테네로부터 북동 방향 42km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서 서로 대치할 때

밀티아데스가 뛰어난 용병술로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이때 페르시아는 해군력을 비밀리에 이동시켜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

이를 알아차린 그리스가 중무장 상태로 육로 42km를 전력 질주하여

페르시아 함대보다 먼저 아테네에 도착해 방어하자 페르시아는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란은 마라톤 전투에서 대패한 선조들의 뼈아픈 역사 때문에 국제 마라톤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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