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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4 털개회나무

서영도 2023. 6. 5. 11:58

 
일  시   :   2023. 6. 4.
 
경  로   :   성삼재주차장 ~ 무넹기 ~ 노고단 정상 ~ 왕시루봉 갈림길 ~ 문수대 ~ 성삼재주차장
 
목적    :    털개회나무 꽃길 따라 그 향기에 취하기
 
 

 
이 주 전 문수대 주변을 찾았지만 개화 시기를 맞추지 못해 털개회나무의 꽃봉우리만 보고 되돌아서야 했다
토요일 오후 4시 30분 경 달궁 마을에서의 일박을 위해 창원의 집을 나섰다
녹내장으로 인한 시력저하로 야간운전이 힘들어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일요일 성삼재주차장을 이용하려면 아침 일찍 도착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시 조금 넘어 달궁의 民宿에 도착해 구석진 조용한 2층방 한 칸을 요청하고 1층 식당에서 일찍 저녁을 먹었다
긴 밤 딱히 할 일은 없어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읽다 10시 경 잠자리에 들었다
 

신혼 부부가 든 방도 아니건만 눈치없는 주인장이  화목 보일러를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방이 들끓을 정도로 더운데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12를 훌쩍 넘겼는데도 도대체 잠이 들지 않는다
발코니에 놓인 의자에 나가 앉아 허공에 걸린 달과 동무 삼아 무심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서로 바라볼 뿐이다
여윈잠마저 어설프게 들이지 못한 채 3시 40분에 일어나 준비한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성삼재로 향했다
 

주차장 도착 후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쉬다가 5시가 좀 안되어 실눈을 떠보니
반야봉 엉덩이 주변이 순간 벌겋게 변해 있다
이 아지매 중년을 넘겨 이제 경도가 끊어졌음직도 한데 샛서방 만나 새삼스레 회춘이라도 한 것일까?
아무튼 개짐 서답 헹군 물처럼 발그란 빛깔이 참 맑고 고와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옛여인들이 천으로 만든 생리대를 사용했던 시절,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가 부엌 구석진 곳에 놓아둔
대야에 담긴 천에서 우러난 붉은 선홍빛의 색깔이 어찌나 고왔던지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난 정말 아름다운 붉은 색을 대할 때마다 개짐(생리대)  서답(빨래) 헹군 물빛에 비유하곤 한다
 

대자연은 어쩜 이토록 광막한 캔버스 위에 인간이 감히 흉내조차 내볼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을
이렇게 멋지게 그것도 순식간에 완성해내는 돌올한 재주를 지닌 것일까
그 신묘한 재주로 날 새롭게 태어나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무넹기에서 임도를 따르지 않고 능선길을 따라 오르며 바라본 구례 방면.
구례 들판과 오산을 휘감고 흘러 들어오는 섬진강 물길이 굽이져 흐르고 있다
 

마가목
잎의 가장자리 톱니가 말의 이빨처럼 날카롭다하여 `마이목`이 변한 이름이라 하는데
 

가을이면 빨간 마가목 열매가 대개 워낙 높게 달려 채취가 감히 엄두를 내보기 어렵기 십상인데
이놈은 딱 내 눈 높이에 꽃이 피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손에 타지 않고 가을에 다시 올 때까지
남아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몸에 좋은 약이라도 해먹게...
 
 
2주 전에는 확인조차 하지 않기에 노고단 탐방 사전 예약을 하지 않고 그냥 오려다 혹시나 하고 예약을 다시 했었는데
오늘따라 공단직원이 입구에서 예약증을 보자고 한다
QR코드를 캡쳐한 사진을 보여주고 들어서 조금 오르니 우측으로 눈에 익은 복주머니란이 보인다
5월 초 영원사 뒤란에서 개화 시기가 맞지 않아 딱 한 송이만 보았었는데....
 

1주일만 빨리 5월말에 왔더라면 꽃이 훨씬 보기 좋았을 것 같다
약간 시든 느낌이다
 

열매가 개불알을 닮았다고 하여 개불알꽃으로 불렸는데 시인은 이를 노래했다
 
 
       개불알 꽃
 
                                       정호승
 
개불알꽃을 보았다
우리집 바둑이의 불알과 너무나 닮았다
바둑이는 좋겠다
불알에도 꽃이 피니까
 

좌 왕시루봉능선, 우 형제봉능선이고 그 사이가 진도사골이다
 
오래 전 문수골 제일 윗마을 신율의 주민한테 들었던 진도사골 유래가 오늘따라 새삼스레 떠오른다
옛날 진도사골에서 도를 닦던 도사가 도가 막 터지려 하는데 해가 지려 해 더 이상 수행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도사는 계곡 한가운데 바위 구멍을 뚫어 통나무를 박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끈으로 묶어 놓고
공부를 계속해 마침내 도를 통했다고 한다
당시 통나무를 꽂았던 구멍난 바위가 계곡 한 가운데 있는데 큰, 작은 진도사골 합수부 40~50미터 전이다
비록 터무니없는 이야기일망정 예전에는 구전을 들으며 산행하는 맛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구전을 들을 만한 현지인을 찾기 어려우니 좀 아쉬울 뿐이다 
 
  

노고단 정상 돌탑
 

노고단 정상에서의 조망.
하봉, 중봉, 상봉 촛대봉, 시루봉이 잘 보인다
 
 
이후 노고단 정상 주변의 목책을 넘어 샛길 능선길로 들어섰다
이 능선길 초반부에 털개회나무 개체가 몇 그루 있다
 

처음 만난 개체가 꽃봉우리만 매단 채 개화는 아직 멀었다
이 주 전 문수대 주변에서 꽃봉우리만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로 향기는커녕 만개한 꽃을 보지 못하고
헛탕을 칠 것 같은 예감에 다리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오늘 또 똥 친 작대기 된 기분이랄까.....
 
 

털개회나무와 꽃개회나무가  서로 헷갈리는데 구별점은 이러하다
윗사진에서 처럼 꽃대가 전년도 묵은 가지에서 올라와 꽃이 피면 털개회나무이고,
꽃대가 새로 나온 햇가지에서 올라오면 꽃개회나무이다
 
 

털개회나무야
꽃을 피우고 너의 향기를 내뿜어라
시절이 언제인데 왜 그렇게도 꾸물거리느냐
내 똥끝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줄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노고단 정상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르다 왕시루봉 갈림길의 조망.
中景에 토끼봉 좌측으로 삼도봉에서 시작되는 불무장등능선,
遠景으로 하봉, 중봉, 상봉, 촛대봉, 시루봉이 장쾌하게 내달린다
꽃을 만나지 못해 안달하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왕시루봉 갈림길의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큰진도사골.
큰진도사골 물길을 끝까지 잘 이어 오르면 문수대로 곧장 이어지니 바위  약간 우측 아래 문수대가 있을 것이다
 

왕시루봉능선 좌측으로 섬진강 물빛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빤짝이는 듯하다
아니면 물속의 은어가 뛰놀며 뱃살이 희번덕거려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노린재나무에 일별을 던지고 이후 곧장 왕시루봉능선 속으로 빠져들듯 쏟아진다
돼지령(비목)까지 진행해 문수대 들머리로 들어서봐야 그 구간에서는
오늘 산행 목적인 털개회나무를 별반 만나지 못할 것 같기에 선택한 결정이다
 
 
발길의 흔적이 없어서인지 분기점에서 한동안 뚜렸하던 산길은 이내 아리송해져 버린다
 
왕시루봉능선상의 문수대 들머리에서부터 문수대까지 산길 상황은 발길 흔적이 별로 없었던 탓인지  좋은 편이 아니다
가령 물길을 따라 윗쪽으로 향하다 좌측 산죽 속으로 이어진다든지, 
갑자기 돌너덜을 따라 윗쪽으로 한동안 꺽어 오르다 다시 왼쪽으로 틀어야한다든지
하여튼 눈여겨 잘 살펴야 산길을 이을 수 있다
털개회나무가 특히 산길 주변으로 많은 개체가 발견되기때문에
나처럼 털개회나무의 꽃과 향기를 목적으로 나선 산행이라면 산길을 제대로 이을 필요가 있다
 

쥐다래
잎에 붉은 빛이 돈다, 아예 흰색이면 개다래이다
 
왕시루봉능선상의 문수대 들머리에서 문수대에 이르기까지의 거리상 절반 못미친 지점쯤
이 쥐다래나무가 보이면서부터 만개한 털개회나무가 갑자기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또 헛탕을 칠 것만 같은 생각에 무척 안타깝기만 하던 마음이 일시에 해소되는 순간이기도 한데
마침내 꿩 먹고 알 먹고, 호박이 덩굴째 떨어져 오달진 느낌이랄까
 

쥐다래 꽃
 

쥐다래의 가지 골속은 황갈색이고 계단형이다
 

쥐다래 나무 주변으로 털개회나무가 무더기로 활짝 피었다
그야말로 滿開야,  滿開야
 

역시 묵은 가지에서 꽃대가 올라온 모습이다
식물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식물도감 책의 설명만으로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국립수목원의 질문방에 몇 차례 사진을 올리며 질의한 결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향기는 얼마나 좋고 암팡지게 진하든지 연신 콧구멍을 실룩실룩거리는데 이내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다
이 하나 보고 민박까지 하며 멀리 찾아온 보람이 차고 넘친다
 
털개회나무의 향기는 일찌기 해방 후 미군정청 소속 엘윈 마셜 미더(Elwyn Marshall Meader)가 알아보았다
그는 1947년 동료들과 북한산 백운대를 등산하던 중 털개회나무의 종자를 취득해 귀국 후
일반 라일락보다 키가 1/3정도 되는 왜성의 원예 품종인 난쟁이 라일락으로 개량하여
이를 `미스킴 라일락(왜성정향)`으로 명명했었다고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후 문수대에 이르기까지 만개한 털개회나무가 이렇게 쭉 이어진다
 

문수대 도착하기 전 꽃을 든 남자.
 
꽃향기에 취한 영향도 있을테지만 왠지 카랑카랑한 눈빛을 잃고 초췌해졌음은 솔직히 감출 수 없을 것 같다
난 작년 가을 경 골프를 치며 평소같지 않은 피로감을 느낀 후 혈액암의 한 종류인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이후 작년 12월부터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사흘 전에도 항암치료를 받고 왔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털개회나무의 향기에 빠져 몸과 마음이 좀 새로워졌으면 하는 일말의 생각으로
손발끝 하나 까딱하기 싫는 전신무력감과 갖은 약물부작용을 견디고 찾아온 것이다
 
진단 초기부터 동기 및 직장 동료들한테 발병 소식을 전하고 투병기를 올려왔기에
나의 상황을 잘 아는 그들은 내가 이렇게 다니는 걸 보면 내가 진정 환자인지 갸우뚱하지만 
난 치료는 성실히 받되 가능한 내가 환자라는 의식은 하지 않고 현재의 내 체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이렇게 움직이며 지내고 있다
단지 면역기능의 저하로 인한 감염위험을 피해 가능한 대인접촉을 회피할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 시련의 시간이 마냥 지속되지 않을 것이리라.
 

문수대 입구.
이 주 전에는 입구를 지나쳐 트랙을 보고서야 되돌아왔었다
스님이 안계시니 주변에 풀이 자라 그냥 지나치기 쉬울 지경이었다
 

불등이라도 걸리지 않았으면 토굴인지 헷갈릴 정도로 퇴락한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문수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은 단연 문간 옆에 우뚝 솟은 구상나무일 것이다
 

문수대에 상서로움을 부여해주는 암벽.
 
마당곁, 샘가 주변에 우묵장성으로 자라던 당귀도 거의 찾을 수 없고
뒤쪽 샘가에 단지 한 두 그루 보일 뿐이다
 
 
이후 문수대에서 KBS송신소에 이르기까지 발길의 흔적이 흔했음인지 산길은 뚜렸하지만
이 지역은 털개회나무가 별로 없다
하지만 도중 사면으로 넓게 펼쳐진 돌너덜 중간을 통과하는데 이 돌너덜 가장자리를 따라
털개회나무가 다수 분포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면을 볼 때 털개회나무 특성이 돌너덜 등의 영향으로 주변의 나무들이 우거지지 않아
햇볕을 잘 받는 위치에 서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돌너덜 부위의 문수대쪽
 

돌너덜길
 

돌너덜 가장자리 부위

털개회나무 분포가 비교적 많은 지역(청색의 원과 타원형 지역)
 

KBS송신소 부근에서 바라본 왕시루봉능선과 백운산.
 
업고 또 업고, 서로 부둥켜 껴안으며 첩첩이 이어지던 능선이
원경으로 멀어질수록 농담의 색채가 점점 묽어지더니
어느새 저멀리 구름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내처 능선 끝을 쫒던 눈길이 그 끝을 붙잡으려다 결국 놓치고 마니 황망해할 뿐이다.
 
성삼재주차장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발길이 이 주 전과 비교해 한없이 가볍다
오늘은 진정 털개회나무의 꽃에 반하고 향기에 흠씬 취해
나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소원한 나의 기도를
지리산신령님이 들어주신 날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