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때까지 난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의 첩첩산중 산골에서 살았다
나의 집은 마을과는 제법 떨어진 산속의 외딴 독립가옥이었는데
만약 무장공비라도 나타났더라면 쥐도새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기
십상이였을 그런 외진 곳이였다
군인으로서 전출이 잦으셨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형을 데리고 타지에 나가계신
경우가 많았기에 난 할머니와 단둘이서 따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 기억하는 그 당시 유년 시절의 가장 친했던 놀이 친구는 우리집 강아지였다
개집은 집마당 한켠에 볏단을 원뿔모양으로 엮어 만든 형태였는데
어느 날 태어난 새끼들중에 뒷다리 하나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기형의 세발 강아지가 있었는데
이 놈이 나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뒤뚱거리며 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조차 했는데 논다는 게
이 세발 강아지를 괴롭히는 것이였다
세발로 지아무리 달려도 빠르게 달리지 못하니 결국 나에게 붙잡혔는데
뒤집어 땅바닥에 드러눕히거나 아니면 마치 세발자전거인양 등에 올라타서
짓누르며 고문같은 해찰을 부렸던 게 종일토록 소일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기야 문명세계와는 동떨어진 산골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해찰거리라곤
없었으니 비록 세발 강아지한테는 고역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심심풀이 친구였다
이후 산중 독립가옥를 떠나 아랫마을 근처로 이사를 내려왔다
이른 봄 해토머리부터 녹기 시작한 땅를 한참 어기적거려 디뎌밟고 내려선 마을에서
또래녀석이랑 자연스레 어울리며 새로운 해찰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산골 마을에 하루 딱 한 차례 낮 12시경 버스가 마을 앞 비포장 신작로를 통과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쇠떵어리 물체가 사람을 실어와 부리고는
다시 태우고 떠나가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나는 비포장길에 날아오르는 흙먼지를
뒤집어써면서도 사라지는 버스 뒷꽁무니를 따라 쫓아가곤 했었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먹어보지도 못하는 감, 괜히 찔러라도 보자는 심정이었던지
타보지도 못하는 버스가 다시 출발할 때 뒤에서 돌맹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렇게 던진 돌이 제대로 버스를 맞혔는지 유리창이 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화가 난 운전수 아저씨는 나를 겁주려 했음인지 경찰서로 데려간다며 나를 잡아끌며
그토록 타보고 싶어하던 버스에 태우려했는데 당시 난 경찰서로 잡혀가면 무조건
죽는 줄로만 알았기에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며 발버둥쳤고 결국 버스 출입문까지
끌려가 출입문을 붙잡고 버팅기며 올라서지 않으려 얼마나 용을 써며 울었는지 모른다
그 날의 충격 이후 난 그 동네를 떠나는 날까지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미리 찻길에서
먼 발치에 숨어있다가 버스가 완전히 지나간 다음에야 다시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 해 늦가을, 다소 쌀쌀해진 바람에 낙엽이 분분이 흩날릴 때,
아버지의 또다른 전출에 따라 난생 처음으로 도회지로 나가게 되었다
봄이면 울긋불긋 꽃대궐 같았고, 여름이면 짙은 숲그늘 드리운 나무 아래 놓인
평상 위의 낮잠이 달았고, 가을엔 만산홍엽이 산너울 따라 물결쳤고,
겨울이면 나의 키높이로 쌓이는 눈속에 파묻혀 아예 집밖을 나서지 못했던
정든 산골집을 마침내 떠나게 되었다
이 정든 산골집에 대한 추억은 내 의식의 심연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아로새겨져 내가 지금처럼 지리산행중 깊은 산속을 홀로 헤매일 때에도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즉 과거 산골집에서 외톨이로 지내던 시절과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과거의 추억과 연상되어지며 그 때 당시의 감정 상태을 느끼게 된다는 의미이다
떠나는 날 군용트럭의 뒷칸에 올라타 온몸을 군용담요로 에워싸고 앉았을 때
세발 강아지는 이별을 예감했음인지 불안한 기색으로 이리저리 끙끙거리더니
트럭이 출발하자마자 짖어대며 혼신의 힘으로 한동안 뒤쫒아 왔는데
난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그저 눈물 어려 흐려진 눈으로 바라만 봐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 아린 장면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시작된 마산에서의 도시생활은 산골촌뜨기에게 새로운 도전을 의미했다
우선 경상도 사투리와는 전혀 다른 억양의 강원도 말씨는 주변 동네 아이들한테
놀려먹기 좋은 소재가 되었으며 내성적이기도 했던 얼뜨기는 몇차례의 놀림을 당한 뒤
아예 집밖을 나서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맴도는 앉은뱅이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 가택연금을 스스로 선택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듬해 봄 초등학교에 진학을 하게되었는데 입학 전까지 책이라곤
잡아 본 적 없고 오로지 놀기만 했던 나에게 학교생활은 결코 즐겁지 못했다
3학년이 되어서야 한글을 떠듬떠듬 읽기 시작했으니 학교 공부는 고통의
시간일 수 밖에 없었다
읽기가 제대로 안되니 쓰기는 더더욱 어려웠고 따라서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뿐더러 숙제는 그 내용을 파악조차 못했으니 선생님한테 벌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심지어 어떤 때는 왜 벌을 받는지도 모를 정도로 멍청했던 것 같다
얼마나 얼뜨기였던지 하루는 방과 후 낮잠을 자고 일어난 저녁 무렵,
장난기가 발동한 형이 학교 갈 시간이다는 장난말에 속아 정말 학교로 간 적이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각이니 당연히 교실문은 잠겨 있었고 실내로 들어가지 못하니
난 내가 너무 일찍 등교한 줄로만 착각하고 철봉에 매달려 놀고 있었는데
형이 데리러 와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분은 오히려 좋았다
왜냐하면 당장 재미없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 기쁜 일이었으니....
당시 나의 앞집에 나랑 같은 반이였던 계집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내가 교실 복도에
꿇어앉는 벌을 받거나 화장실 벌청소를 당하는 날이면 꼭 이런 사실을 나의 부모님에게
달려와 고자질을 했었다
나와는 정반대로 되바라지게 까졌던 그 애가 시험에서 번번히 백점을 받을 때
난 한 자리수 점수를 받기도 했으니 날 업신여겨 놀려먹기 좋은 상대로 여길만도 했겠지만
입이 얼마나 간질거렸기에 자기 집부터 가지 않고 가방을 맨 채로 나의 집부터 달려와 고자질을 했단 말인가
망할년 같은 가시나 !....
그러나 살다 보면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꽝 막혔던 머리가 늦게 뚫리기 시작하더니 6학년이 되어서는 가파른 속도로 뚫려
전국적으로 마지막까지 유지되었던 중학교 입학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고
그 이후 나와 망할년 사이의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었다
내가 고자질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였는데
입학시험을 잘 치뤄 좋은 성적의 장학생으로 입학하던 날 무척 기분이 좋으셨던 어머님이
그때서야 옛날 이야기 하시듯 말씀하실 때 비로서 알았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벌청소를 하거나 회초리 맞는다는 소리를 전해들을 때
결코 마음이 편치만은 않으셨을텐데도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혼을 내거나 다그치지 않고 끝까지 나를 믿어주셨던 부모님에게 진정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기에 생로병사의 섭리를 피해 갈 수는 없다할지라도 오래오래 사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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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학회에서 돌아오는 길 창밖 썰렁한 가을 풍경에 한참을 시선이 머물렀다
새삼 시간이 번쩍번쩍, 하루가 성큼성큼 지나간다는 느낌이다
실낱같은 목숨으로 천길낭떠러지 앞에 서는 날 과연 난 웃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고
공연히 스산해진 마음을 달래며 옛날 기억도 더듬어 보았다
그렇게 회상되었던 기억 편린들의 조각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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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돐 1969년 초등 6학년 <중간열 우측 두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