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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05 열하일기 3 <고북수진>

서영도 2018. 11. 8. 15:13

 

사마대장성은 고북수진에서 접근할 수있는 장성이다

엊저녁 고북수진 야경을 보았는데 사마대장성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 고북수진 마을 윗쪽에 위치하고 있어 

케이블카를 타러 걸어 올라가며 자연스레 고북수진의 아침 풍경도 둘러보게 된다

 

 

 

 

 

 

 

 

 

 

집집마다 담장을 타고 오르다 치렁치렁 널어진 담재이덩굴은 불이라도 붙은 듯 온통 붉게 물들어 가을의 정취를 더하고

아주 오래된 마을인양 고색창연한 느낌마저 든다

 

 

 

 

대문 앞 양쪽에 매달린 고추와 마늘은 우리나라 시골 농촌의 풍경과 닮았고

유난히 붉은 등은 마치 홍등가의 불빛인양 보여 사내의 눈길을 붙잡는다

 

 

 

 

엊저녁 은은한 불빛을 받은 풍경과 물속에 반영된 수면 아래 또다른 풍경의 어울림은 수향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물결따라 일렁이는 그 모습은 별로 꾸미지 않았음에도 최고의 화려함이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그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고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일 뿐이다

결코 추하지 않은 단백함,

수수하면서도 우아하고 화려한 멋,

현대적이면서도 고색창연한 옛스러움의 멋,

결코 지루하지 않은 변화무쌍의 아름다움,

고북수진은 마치 밤이면 요부로 변신하는 양면성의 요조숙녀이다,,,,

 

 

 

 

 

 

 

마을 뒤 톱니바퀴 능선에 사마대장성이 보인다

 

 

 

 

 

 

물길을 따라 지어진 수향 마을이다

 

 

 

 

 

 

 

 

 

 

온천수에 족욕을 할 수 있다

 

 

 

 

 

 

 

나룻배를 타고 수향마을을 구경할 수도 있다

 

 

 

 

 

그 옛날 저렇게 험한 능선을 따라 장성을 쌓았다는 게 대단한 일이다

 

 

 

사마대장성(司马台长城  Simatai Great Wall)

 

북경에서 약 120 km 떨어진 고북구진에 위치한 장성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국가 4A급 관광지이다

1368년 명나라 척계광에 의해 개축되었으며 만리장성 구간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다

가파르고 험준한 산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대단해 마치 범이 버티고 앉아 있는 듯하고 용이 서려 있는 듯하다

전체 길이 5.7 km로 동쪽 망경루에서 서쪽 후천구까지 이어져 있고 총 35개의 망루가 있다

 

명나라 장성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장성으로 최고 높이는 약 1000 m 이다

대량의 문자가 적힌 돌이라던지, 아름다운 건축 공예는 장성을 더욱 웅장히 보이게 한다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어 `구름 속의 용`이라고도 부른다

영국 타임즈는 `전세계에서 꼭 가봐야 할 25곳 관광지 중에 첫 번째로 사마대장성을 꼽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 실제 경사가 꽤 가파르다

 

 

 

 

 

 

 

 

 

 

 

 

 

 

 

 

사마대장성에서 내려본 고북수진과 원앙호

 

 

 

사마대장성을 보고 다시 고북수진 마을을 통과해 내려간다

 

 

 

<고북구와 고북수진의 지리적 위치>

 

연암 일행이 연경에서 열하로 갈 때 지나갔던 곳은 고북수진 바로 옆 고북구진이다

 

 

 

 

 

일찌기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연암을  5000년째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했고 요즘 논자는 `한국의 세익스피어`로 치켜세운다

적어도 열하일기가 `한국 최고의 기행문학`임에는 의견을 달리 하지 않는다

 

연암이 연경에 도착한 건 8월 1일이었고 8월 9일 아침까지 열하에 당도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출발한 건 8월 5일이었다

연경과 열하 사이는 700리길, 죽을 힘을 다해 무박4일 일정으로 강행군을 하게 된다

8월 5일과 9일 사이의 기록이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인데 연암 산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와 `일야구도하기(日夜九渡河記)`가 그 속에 있다

 

나흘 밤낮 동안 한 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걸어야 했으니 달콤한 잠의 유혹이 오죽했으랴

연암은 8월 8일 일기에서 이때의 고통을 설명하며 길가에 있는 돌에게 하는 맹세로 표현했다

 

『 " 내 장차 연암 산중에 돌아가면, 일천 일 하고도 하루를 더 자서 옛 희이선생(송나라 때 도인으로 한번 잠들면 천 일씩 잤다)

     보다 하루를 더 자고, 또 코 고는 소리를 우레처럼 내질러 천하의 영웅이 젓가락을 놓치게 하고,

     미인이 기절초풍하게 할 것이다. 만약 이 약속을 어긴다면 내 기필코 너와 같이 돌이 되고 말테다. "

     꾸벅 하며 깨어나니 이 또한 꿈이었다

     창대(마부)가 가면서 뭐라뭐라 떠들어대기에, 나 역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잠꼬대가 그토록 생생하였다.』

 

열하일기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음식은 술이다, 연암은 술을 꽤 즐겼고 정도 무척 많았다

장마로 압록강 물이 불어 열흘이나 강을 건너지 못하다가 마침내 의주 땅 구룡정을 하직하게 되었을 때

창대(마부)와 장복(하인)이 수중의 동전 스물 여섯 푼을 털어 술 한 병을 사온 일이 있었다

연암은 그 술을 한 잔 마신 뒤 다른 한 잔을  가득 부어 문루(門樓)의 첫째 기둥에 뿌려 도강(渡江)이 무사하길 빌었고,

또 한 잔을 둘째 기둥에 뿌려 창대와 장복을 위해 빌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을 땅에 뿌려 애마를 위해 빌었다

 

건륭제의 부름을 받고 8월 5일 연경에서 열하로 떠날 때 인원 제한으로 그만 하인 장복이를 떨어뜨려야 했는데

열하로 가는 말 위에서 연암은 " 인간으로 가장 괴로운 것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 생별이 사별보다 슬픈 것이다.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는 것은 순리의 이별이며 순리를 따르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다 " 라고 하며

장복이를 데려가지 못하는 생별의 아픔으로 울부짖었다.

 

 

 

 

 

 

 

*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

 

연암이 야삼경 한밤중에 고북구를 빠져나가며 솟구치는 감회를 누루길 없어 따로 `出古北口記` 썼다고 한다

금쪽 같이 좋아하는 술을 따라 먹을 갈고 이슬로 붓을 풀었다고 하는데....

『 고북구 관문을 나서기 전 술을 사서 조금 마시고 남겨둔 술이 있었다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 속에서 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자를 썼다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야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노라(乾隆四十五年康子八月七日三更朝鮮朴趾源過此)` 』

 

  이렇게 21자를 갈겨놓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내 한낱 서생일 뿐이로구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야 비로서 장성 밖을 나가게 되다니. 』

어릴 적 간이 작아 겁쟁이였던 연암은 한밤중에 장성 밑에 우뚝 서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도깨비 같은 절벽과

짐승 같은 바위가 수두룩한 음산한 골짜기 속에 태연하게 서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스레 생각하기도 했다.

 

 

 

 

고북구 관문을 빠져나올 때의 풍경 묘사는 압권이다

『 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벼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놓은 칼날 같았다.

    마침내 달이 고개 넘어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듯했다.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은 관문 안쪽으로 반쯤 꽂혔다.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도 함께 운다. 짐승 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 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 놓은 듯하고,

    두 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

    하늘 저편에서 학 울음소리가 대여섯 차례 들려온다. 맑게 울리는 것이 마치 피리 소리가 길게 퍼지는 듯한데,

    더러는 이것을 거위 소리라고도 했다 』

 

 

 

 

 

*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日夜九渡河記) *

 

백하(白河)를 건널 때 들리는 물소리의 묘사와 마부가 말발굽에 밟혀 뒷수레에 실려 오자

연암이 손수 고삐를 잡고 물에 들어간 체험을 기록한 산문이다

 

『 두 산 틈에서 나온 하수는 돌과 부딪혀 으르렁거린다.  그 솟구치는 파도와 성난 물결과 슬퍼하며 원망하는 여울이

    놀라 부딪치고 휘감아 거꾸러지면서 울부짖는 듯, 포효하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듯 사뭇 만리장성을 깨뜨릴 기세다.

    1만 대의 전차, 1만 명의 기병, 1만 문의 대포, 1만 개의 전고(戰鼓)로도 우르릉 쾅쾅 무너뜨려 짓누르고 압도하는 듯한

    물소리를 형용해 내기엔 부족하다. 모래벌 위 거대한 바위는 한쪽에 우뚝 서 있다. 강둑의 버드나무 숲은 어둑하여

    강의 정령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장난을 거는 듯하고, 양옆에선 교룡과 이무기가 사람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듯하다 』

 

연암은 한밤중에 강을 건너는 위험을 언급하며 물소리는 듣기에 따라 퉁소 소리, 산이 찢어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소리, 벼락과 천둥 치는 소리,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소리, 찬물이 끊는 소리 등으로 바뀐다며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듣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마음의 눈을 감은 자는 귀와 눈이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발을 믿고, 발은 땅을 믿는 것이다 " 라고 했다

 

마침내 도를 깨우친 듯한 말이 이어지는데

『 말의 재갈을 풀어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

 

 

 

 

 

 

 

 

 

 

연암은 정조나 당시 성리학파가 교과서로 믿고 있는 한(漢)대의 문체와 당(唐)대의 시율 등 고전적 문체만을 법도로 여기지 않고

패사(稗史), 소품은 물론 우언이나 우스갯소리 심지어 중국의 구어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수용하는 자유문체, 자유구성을 구사했다

정조가 문체를 바로 잡으라는 경고를 한 문체반정을 일으킨 핵심에는 열하일기의 연암체가 크게 작용을 했는데

당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연암의 열하일기가 어느 정도의 화제작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 관료였던 남공철에게 이렇게 분부했다

『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보아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해라<나의 아버지 박지원> 』

<문임 - 홍문관, 예문관 벼슬>

 

이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 임금님께서 `열하일기`를 거론하신 건 기실 노여워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파격적 은총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면서도 특히 박아무개를 들어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고 하신 것은

  박아무개에게 주의를 주어 장차 문임을 맡기려는 의도이시다 . 더군다나 `열하일기`를 가리켜  문체를 그르친

  장본인이라 하시면서도 그것을 익히 보셨노라고 하여 애호하는 뜻을 나타내셨음에야 ! "

즉 정조는 연암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두른 것이었다.

 

 

 

 

 

정조의 노회한 조치에 연암은 채찍과 당근 모두를 비켜나간다

" 보잘것 없는 제 책이 위로 임금님의 맑으신 눈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중년 이래로 불우하고 영락하여 스스로 자중하지 못하고 글로써 유희를 삼아 때때로 궁한 처지에서 나오는 근심과

  게으르고 나태하여 원고를 챙기고 단속하는 일을 제대로 못한 탓에 자신과 남까지 그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문풍이 이 때문에 진작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문단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입니다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는 쓰겠습니까. 』

 

연암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반골이었다,

영조 46년 과거 1차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고도 2차 시험에는 백지를 제출했었다

정조의 관심도 집요했다

연암은 50세 이후 가난을 어쩌지 못해 호구지책으로 벼슬길에 나갔는데 1797년 면천군수에 임명되었을 때 정조를 알현하자

" 내 지난 번에 문체를 고치라고 했는데 과연 고쳤느냐 " 고 다그치며,

제주 사람 이방익이 바다에 표류한 일의 전말을 들려주고 기어코 글을 쓰게 만든다.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는 이렇게 해서 쓰여진 글이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朴珪壽)가 우의정(대원군 때)까지 역임했음에도 조부의 문집을 공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열하일기는 오랜 시간 뜨거운 감자였다.

 

 

 

 

연암이 조선을 출발할 때 꾸린 행장은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말의 안장에 단 주머니 한 쌍에는 벼루,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공책 4권과 이정표 뿐이었다

하지만 연행에서 돌아올 때 그의 행장은 두툼했다

말 위에서도 쉬지 않고 기록한 것과 열하 등에서 청나라인과 필담을 나눈 내용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연암은 삼 년 뒤 열하일기를 탈고한다

 

`열하일기`는 큰 강이나 산에 비유될 수 있다

그만큼 장쾌하다

그런데 그 산은 단 하나의 뫼가 아니고 단 한 줄기 강이 아니다

단편, 수필, 논평, 칼럼, 시화 등이 실학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로 엮인 장편 연작이다

세계적인 장편 기행문이자 철학, 정치, 경제, 천문, 지리, 풍속, 고적, 문화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적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것이다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상하, 빈부, 적서, 관민의 차별을 타파하겠다는 이상을 외쳤고

가난, 봉건, 미신을 몰아내고 넉넉히 어우러지는 풍요, 즉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을 말하고자 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