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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6 그리스9 <크레타>

서영도 2022. 6. 11. 10:12

크레타는 그리스 13개 주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스에서 제일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8,336㎢으로 제주도의 5배 정도이며 인구는 64만명 정도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신비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 바로 크레타 섬이다. 

크레타를 빼놓고 고대 그리스를 이야기 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최초의 기원이 바로 크레타 섬에서 발흥한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tion)이기 때문이다. 

 

 

★ 크노소스 궁전(Palace of Knossos)

 

기원전 2,000 ~ 1,500년 경에 건축되었으며

청동기 시대 유적지로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로 에게 문명의 지배자였다

 

동서 170m, 남북 180m 규모로 장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중앙의 중정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작은 방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계단과 회랑이 많아서 `미궁의 궁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궁전 동쪽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사생활 공간과 작업장이 있고, 

서쪽에는 제의, 집정, 알현 등을 위한 공무용 공간과 창고들이 있다

 

크노소스 궁전 복원도

 

 

크노소스 궁을 발굴한 사람은 영국인 아서 에번스 경(Sir Arthur John Evans, 1851-1941)이다.

그는 독일인 슐레이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데 자극받아 크레타 문명 발굴과 복원에 평생을 매진한 고고학자다. 

 

에번스가 크레타 문명에 호기심을 갖고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발굴에 매달리게 된 것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기술한 한 대목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출정에 참여한 그리스 동맹군의 함선목록을 나라별로 열거했다. 

이 가운데 크레타 섬에서 참전한 지휘관과 함선 수도 기술하면서 크레타의 특징을 짧게 기술하고 있다. 

크레타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인 셈이다. 

 

“크레테 인들은 이름난 장수 이도메네우스가 지휘했다. 

이들은 크노소스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고르튀스와
뤽토스, 밀레토스, 백악(白堊)이 많은 뤼카스토스, 파이스토스,
뤼티온 같은 살기 좋은 도시에 사는 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일백 개의 도시가 있는 크레테 섬 여기저기에 사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름난 창수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가 지휘했다.
그들과 함께 검은 함선 여든 척이 따라왔다.“

 

'일리아스'의 함선 목록을 보면,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나라에서 함선 12척을 지휘하며 참전했고 

아테네는 50척을 보냈고, 아킬레우스도 50척을 이끌고 참전했다. 

총사령관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만이 최대 규모인 100척의 함선을 갖고 지휘했다. 

이런 상황에서 크레타가 80척의 함선을 참전시켰다는 것은 그리스 동맹군 사이에서 크레타의 국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고, 당연히 이에 걸 맞는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었을 것이다.  

 

에번스는 호메로스의 이런 기술을 굳게 믿었다

슐레이만 역시 호메르스의 이야기를 믿었기에 트로이 유적과 미케네 왕국의 실체를 발굴했던 것이다

에반스는 1898년에 크노소스 왕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후 35년 동안 크레타에 머물며 크노소스 왕궁의 유적을 발굴하고 과거의 건축 양식과 벽화들을 복원하는 데 진력했다. 자신의 전 생애를 크노소스에 바친 셈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크노소스의 건축 구조물은 발굴 당시의 원형과 에번스가 평생의 노고를 통해 복원한 구조물이

뒤섞여 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궁 발굴을 통해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기원일 것으로 생각했던 

당대의 고고학적 한계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왕궁에서 발굴한 수백 개의 유물을 통해 크노소스 궁이 미케네 문명과는 완전히 다르며, 

훨씬 이전에 흥성했던 크레타 문명의 진원지임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스 문명사의 흐름은

최초의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 크레타와 산토리니 섬을, 

그 뒤를 잇는 미케네 문명의 중심지를, 

그리고 암흑기와 상고기를 거쳐 그리스 고전기를 아테네에서 꽃피웠다 

 

 

 

제우스는 크레타에서 태어나고 또 크레타를 자신의 사랑의 도피처로 활용하여 자손을 퍼트렸다.

제우스의 자손들은 크레타에서 미노아 문명을 일으켰다. 

제우스는 신들의 신이다

제우스는 그리스의 많은 지역 가운데 왜 하필이면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게 되었을까? 

당시 에게 해를 지배하고 있던 크레타인들이 제우스신의 권위를 이들이 선취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 가장 앞선 문명을 가졌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우스의 아버지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와 천상의 지배자 우라노스(Uranus)가 낳은

티탄 12신 가운데 막내 크로노스였다.

천상의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신들의 혈족 간에 벌어진다.

우라노스가 자기 자식들을 저승의 깊숙한 곳에 있는 지하 감옥 타르타로스(Tartaros)에 가두어버리자

이에 화가 난 아내 가이아가 티탄 신족과 아들 크로노스에게 아버지를 공격하게 했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잘라 바다에 던져버리고 우라노스를 천상의 권력에서 몰아낸다.

하지만 천상의 권력을 두고 다투는 부자간의 패륜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 역시 자신도 자식 중의 한 명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내쫓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들을 낳는 족족 집어 삼켜 버린다.

이 비정한 아버지의 뱃속으로 삼켜진 자식들은 모두 5명이나 되었는데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5남매다.

 

보다 못한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는 마지막 자식이라도 살리기 위해 여섯째 자식 제우스를 

크레타 섬 이다(Ide) 산의 동굴에 가서 몰래 해산하고

크로노스에게는 제우스 대신 돌덩이를 포대기에 싸서 이를 갓난아기인 양 속여 크로노스가 이를 삼키게 한다

레아는 요정들로 하여금 암염소 아말테이아의 젖으로 제우스를 기르게 한다 

이윽고 제우스가 장성하여 오케아노스의 딸 메티스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에게 약을 먹여 

이전에 삼킨 돌덩이와 형제 자매들을 모두 토해 내게 한다.

제우스는 자기 대신 삼켜졌던 돌덩이를 생명의 은인이라 여겨 세상 한가운데 놓았다. 

세상의 ‘배꼽’이라는 뜻의 옴팔로스 돌덩이가 놓인 곳은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피이다.

 

이후 제우스는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타르타로스들을 풀어주고 이들을 동맹군으로 삼아

아버지 크로노스와 티탄 신족들과 전쟁을 벌인다.

신들의 상징 지물(指物)들을 그 때 퀴클롭스에게서 얻는다.

제우스는 천둥과 번개와 벼락을,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투구를,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받는다.

최고의 무기로 무장한 제우스의 형제들은 아버지와 티탄 족을 물리치고, 천상의 최종적인 권력자로 등극한다.

올림포스 신들의 세상이 이 때 비로소 열린 것이다.

제우스 3형제는 제비뽑기를 통해 제우스는 하늘을, 하데스는 저승을, 포세이돈은 바다의 통치권을 나눠 갖게 된다

 

제우스가 크레타 섬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화는 분명 또 다른 상징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이 이루어진 터전이 크레타 섬이었다는 것은 미노아 문명이 당시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지배적인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크레타 섬은 제우스신의 탄생 신화를 갖게 됨으로써 그리스 문명의 발원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크레타 섬과 제우스의 인연은 계속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인 크레타로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Europe)를 납치하여 사랑의 행각을 벌인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에우로페 공주를 유혹하기 위해 흰 황소로 변신하여 그녀를 안심시킨 후 

그녀를 등에 태워 순식간에 크레타 섬으로 납치했다

에우로페가 정착한 크레타에서 미노아 문명이 꽃피어나 유럽 문명의 시원이 되었으니, 

‘유럽’(Europe)이 ‘에우로페’(Eurōpē)에서 비롯된 것은 자연스럽다. 

미노아 문명이라는 이름도 그녀가 크레타에서 낳은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미노스에서 따온 것이다.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사랑의 결실은 바로 미노아 문명의 주역들을 낳았다

이들 사이에 미노스와 라다만튀스, 샤르페돈의 세 아들과 딸 크레테가 태어났다. 

에우로페는 훗날 크레타의 왕 아스테리오스(Asterios)와 결혼하게 되고, 세 아들은 왕의 양자로 입적된다.

 

크레타와 황소의 인연도 계속된다. 아스테리오스 왕이 죽자 세 아들 간에 왕위 다툼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맏아들 미노스가 신의 뜻이 자신에게 있다며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증표가 필요했고 미노스는 “바다에서 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포세이돈 신에게 황소 한 마리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바다를 헤치며 흰 황소가 나타나자, 두 동생은 신의 뜻이 형에게 있다고 믿고 미노스의 왕위 계승을 인정했다

 

제우스가 신의 자손을 퍼트릴 수 있도록 에우로페를 실어다 준 것은 제우스의 변신인 흰 황소였고, 

미노스가 왕권을 계승하게 만들어준 것 역시 포세이돈이 보내준 흰 황소였다. 

결국 미노아 문명의 개창은 흰 황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는 소를 신성시 했던 크레타의 성우(聖牛) 숭배의 전통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황소에 대한 스토리가 크레타에 유달리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식에 참여한 행렬을 복원한 프레스코화로 남쪽 정문(south propylon)으로 오르는 왼쪽 회랑 벽에 그려져 있다>

 

 

크레타의 황소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괴이한 암소와 황소가 벌인 추악한 행위다. 

인간의 성 풍속사에서 가장 혐오스런 일을 한 첫 번째 사람으로 기록된 이는 

바로 미노스 왕의 왕비 파시파에(Pasiphae)다. 

미노스가 포세이돈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포세이돈은 그 벌로 파시파에에게 저주를 걸어

포세이돈이 크레타로 보낸 흰 황소를 사랑하도록 만든다. 

 

이 황소는 약속을 어긴 미노스에게 보복하는 포세이돈의 변신일 수 있다

파시파에는 비극적이게도 진짜 황소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포세이돈의 변신일지도 모를 황소를 욕망하게 되었다. 

비정상적인 욕정에 사로잡힌 파시파에는 최고의 발명가 다이달로스(Daedalus)에게 애원하여 

실물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의 정교한 암소를 나무로 만들게 한다

파시파에는 나무 암소 안에 들어가 포세이돈의 황소를 유혹하여 교접한다

 

삐뚤어진 성적 욕망의 결과로 파시파에는 우두인신(牛頭人身)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게 된다.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미노스는 그를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 라비린토스의 지하 감옥에 가두고

미노타우로스의 도착된 광기를 인신공양으로 달래게 된다

미노스는 아테네에 잔혹한 공물을 요구했고

미노타우로스는 지하 감옥에서 매년 아테네가 공물로 바치는 7명의 소년 소녀를 잡아먹는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미노스 왕의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함으로써 

아테네의 비극적 굴종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백합왕자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인들의 창조적 예술성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최고의 예술가들은 바로 화가였다. 이들은 인류 최초로 프레스코화를 발명했다

프레스코화는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미처 마르지 않아 축축하고 ‘신선(fresco)'할 때,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다.

매우 이른 시간 내에 완성해야 하는 고난도의 화법이다.

프레스코화는 크레타의 위대한 화가들이 3000여년 이전에 개발한 이래,

수천 년 동안 서양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활용되었다.

16세기 초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에 그린 ‘천지 창조’,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역시 프레스코 기법의 최고 걸작들이다. 유화가 나타나기 전까지 프레스코화는 수천 년 동안 화가들에게 애용되었다.

 

왕의 방(Throne Room)

 

건축가 다이달로스가 3,500여 년 전에 3층 이상의 복층 건축물을 축조했다

2층이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파리지엔` 벽화가 있던 곳이다

 

나무 의자 자리에 왕의 의자인 돌 의자가 있었다

 

옥좌의 방

둥근 돌그릇은 불을 피우던 화로로 추정

 

그리핀(Griffin)

상상의 동물로 독수리 머리, 아름다운 벼슬에 사자의 몸을 한 그리핀이 옥좌를 호위하듯 하고 있다

그리핀은 금광을 지키는 괴조(怪鳥)로 알려져 있다. 

또 아폴론의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미노스 왕조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소의 등을 뛰어넘는 곡예 프레스코화

진품은 이라클리온 박물관에 있다

 

 

 

 

기둥 특징은 위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독특한 양식이다

 

대형 항아리 피토이(pithoi)

 

곡식, 올리브유, 와인, 콩류 등을 저장했던 무수한 대형 항아리 피토이(pithoi)의 존재로

크레타가 경제적으로 아주 풍요했음을 보여준다.


서쪽 저장고에는 피토이 저장을 위한 방들이 무려 40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남아 있던 150개의 피토이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런 대형 피토이는 이후 그리스 본토의 여러 국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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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북쪽 문 통로의 서쪽 보루

 

<북쪽 문으로 들어오는 회랑에 그려진 황소>

 

올리브 나무를 향해 돌진하는 황소의 거친 기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무언가 공격을 받고 반격하는 모습이다

눈은 팽팽하게 부풀어 있다. 입은 거친 숨을 내쉬듯 반쯤 열려 있고,

콧방울도 한껏 팽창되어 가쁜 숨을 내뿜는 듯하다.

진품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니코스카잔차키스 기념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며 1883년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작품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이다

 

크레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문학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총 아홉 번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1957년 알베르 까뮈와 공동 후보에 올라 알베르 까뮈가 수상했을 때

알베르 까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보다 백 배는 더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했다

영국의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Colin Henry Wilson, 1931- 2013)은 노벨상 수상에서 탈락한 카잔차키스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버금가는 작가로 높이 평가하며 아쉬워했다.

그는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기념관

 

친필 원고

 

그가 쓴 소설 '최후의 유혹'과 '미할리스 대장'의 일부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1954년 금서가 되고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신성 모독으로 파문을 당하게 된다

파문당한 카잔차키스는 무덤을 묘지 안에 둘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묘는 베네치아 마르티넨고 성채 위에 크레타의 산과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있다

 

 

1957년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다녀온 뒤 얼마 안 되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그가 생전에 준비해둔 비명이 새겨졌다.

평생 일관했던 그의 삶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널리 알려져 회자(膾炙)되는 묘비명 중의 하나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허나 나는 이렇게 적겠다

" 나는 모든 것을 원한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부도 건강도 젊음으로의 회복을 원하지만 이룰 수 없기에 원한다는 의미이다

 

 

 

★ 이라클리온 시내

 

 

로카 아 마레 요새(Rocca a Mare Fortress)

1523~1540년 건축된 이라클리온 구항구의 베네치아 성채이다

오토만 지배 시절인 1669년부터는 "Koules"로 불린다

 

모로시니 분수(Morozini Fountain)

 

1629년 베네치아 지배 시절 크레타 지사였던 프란세스코 모로시니에 의해 건축되었다

4마리의 사자 입에서 물이 뿜어지는 형상으로

주변을 사자 광장(Lions Square)이라 부른다

 

 

사자 광장의 모로시니 분수 맞은 편에 위치한 카페 Phyllo Sophies

그리스 국민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자주 들렸던 카페이다

 

크레타 시청

 

아기오스 티토스 교회(Agios Titos Church)

 

961년 비자틴의 니키포로스파코스 황제가 크레타를 점령한 후 아랍 지배 시절 약해진 기독교의 부흥을 위해 건축하였다

아기오스 티토스는 바울의 제자이자 크레타의 첫번째 주교이다

 

크레타가 그리스의 제일 남쪽에 위치하였기에 바깥 날씨가 이만저만 더운 게 아니었다

시내 구경을 하느라 한 시간 남짓 이곳저곳 기우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기진맥진할 것만 같았다

이 교회를 발견하고 내부를 구경한 후 구석진 곳의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예배를 들이는 척하며 한참을 졸며 쉬었다

꾸벅꾸벅 조느라 고개를 공손히 숙였으니 예수님을 찬양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of Heraklion)

 

 

돌을 깍아 만들었다

 

기원전 1,900 ~ 1,800

목동과 양떼를 묘사

 

벌 펜던트(Bee pendant)

 

기원전 1800~1700년

벌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다리 사이에 잡고 있는 벌집 위에 입에 물고 있는 꿀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모습이다

머리 위에는 금방울이 든 작은 새장같은 게 얹혀져 있고 꼬리와 날개에 작은 원반이 매달려 있다

 

 

카마레스 도기(Kamares Ware Jug)

 

기원전 2100~1700년

명칭은 최초로 이 종류의 도기가 대량으로 발견된 크레타 섬의 이다 산() 남쪽 가운데에 있는

카마레스 동굴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중기의 미노스Ⅱ로 불리우는 제1궁전시대(B.C.2000~B.C.1600경)의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에서 만들어졌다

추상적인 곡선 디자인과 양식화된 식물 및 바다 모티프들이 검은색 바탕에 흰색·빨간색·주황색·노란색으로 그려져 있다.

 

파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c)

의미는 아직 해석되지 않았다

 

소의 등을 뛰어넘는 곡예사 프레스코화(Bull leaping fresco)

기원전 1600~1400년.

소의 등을 뛰어넘는 곡예 스포츠가 당시 성행했었다

 

한 명이 앞에서 황소의 뿔을 잡고, 곡예사 한 명이 황소의 등을 타고 넘는 묘기를 보이고 있다.

뒤에 있는 투우사는 아마 곡예사를 받아주는 역할을 한 것 같다.

앞뒤의 두 사람이 여성이고, 가운데 곡예를 부리는 사람은 흑인 남성으로 보인다.

여성이 오락용 경기에 참여했다는 점이 다소 흥미로운데

크레타에는 경비를 서는 흑인 용병도 많았고,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흑인들이 적지 않았다

 

군무

 

기원전 1,600 ~ 1,300년 Hagia Trada

유방 장식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

 

The "Dancer" fresco

 

기원전 1,600~1,500년

여신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으로 미노아 문명에서 나타나는 양식이다

쭉 편 오른팔은 권위 및 명령을 표현한다

 

파마를 한 긴 머리, 가슴을 노출한 블라우스

지금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첨단의 유행을 걷는 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500년 전의 크레타 문명이 얼마나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황소 머리 술잔(rhyton)

 

기원전 1,600~1,450년

돌을 깍아 만든 것으로 뿔은 금으로 도금했고  수정과 옥으로 눈을 만들었고 코는 흰색 자개로 만들었다.

또 검은 돌에 음각과 양각으로 황소의 머리털과 가죽 주름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을 통해 크레타 인들의 황소 숭배의 관념을 가시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 냈다

 

뱀의 여신(Snake Goddess)

 

기원전 1,650~1,550년

뱀은 땅속 지하의 여신임을 상징하고 고양이 형상의 머리는 야생동물의 세계의 지배자임을 나타낸다

여사제가 웃옷을 열어 제치고 드러낸 풍만한 가슴은 다산를 상징한다.

미노스 여인들의 예복인 앞치마와 7단으로 내려 펼쳐진 풍성한 치마가 아름답다. 

 

 

왕비 접견실 프레스코화

 

의식행렬

두 청년이 거대한 잔을 받들고 있다

 

백합꽃 왕자(Prince of Lilies)

 

기원전 1,600~1,450년

크노소스 궁전의 프레스코화 중 미노아 문명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쓰이는 그림이다. 

머리에 백합과 공작 갓털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고 전신 실물 크기이다

아서 에번스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크노소스의 통치자(Ruller of Knossos)’이거나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지닌 ‘제사장(priest-king)’일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운동선수, 권투 선수 또는 군대 지휘관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무튼 위엄과 당당함, 건장함이 넘치는 모습이 크레타 문명의 상징 이미지로 활용되기엔 충분한 것 같다

 

파리지엔(La Parisienne)

 

기원전 1,450~1.350/1,300년

여사제 우두머리로 추정한다

크레타 프레스코 벽화 가운데 백미는 역시 ‘파리지엔`으로 불린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이다.

‘파리지엔’ 그림이 그려진 방은 왕의 접견실인 ‘옥좌의 방’의 바로 위층에 있다.

파리지엔은 19세기 당대 최고의 도시적 세련미를 갖춘 멋쟁이의 대명사였다

 

찰랑찰랑한 검은 머리, 특히 이마에 흘러내리는 곱슬머리 가닥이 자유 분망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검은 동공을 가진 커다란 눈, 오뚝한 코, 붉게 화장한 입술은 고혹적이다. 

붉은 줄과 푸른 줄이 세로로 그려진 의상 또한 여성미를 물씬 풍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3500여 년 전의 여인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놀라우리만큼 세련되고 아름답다. 

세계인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파리의 여인’이라 불리는 된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공주

 

기원전 7세기

" 나 사랑해 ?, 그럼 나랑 결혼해줘 " 라고 서로 말하는 것만 같다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을 나누어 낳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골칫거리였다.

난폭하기 그지없고 소란을 피우면서 사람까지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괴물을 안전하게 가둘 수 있는 궁전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솜씨 좋은 건축가는 누구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미로의 궁전 라비린토스(Labyrinthos)를

건설했고 그곳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놓았다.

배고플 때마다 울부짖는 야수를 달래기 위해 수시로 사람을 집어넣어야 했다.

당시 에게해 전역에 위세를 떨쳤던 미노스는 아테네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매년 미혼 여성 일곱 명과 총각 일곱 명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미노타우로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테네의 왕자였던 테세우스는 조국의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크레타로 가서 미노타우로스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하고 조공의 일원이 되길 자원했다.

크레타에 도착한 그의 일행은 미로의 궁전에 던져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청년들을 구하려는 테세우스의 용기는 헛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몸집의 난폭한 괴수와 맞서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미로에서 나올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여전히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있던 다른 젊은이들과는 달리 테세우스의 표정엔 여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탈출의 길을 안내할 실타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라비린토스로 들어갈 때,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 공주가 건네준 것이었다.

그는 입구에서부터 풀어놓았던 실타래를 되감으면서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약속대로 아리아드네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하고 아테네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함께 배를 탔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미노스가 추격할 것이 뻔했고 그래서 안절부절했다.

테세우스 일행은 낙소스섬에 들러 하루를 묵었다. 그 섬은 아테네와 크레타의 거의 중간에 있었다 

아침에 깨어난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랐다. 테세우스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미노스를 따돌리고 허겁지겁 크레타를 떠난 뒤,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테세우스는 그만 아버지와 했던 중요한 약속을 깜빡 잊고 말았다.

아테네를 떠날 때는 검은 돛을 올렸지만, 괴물을 처치하고 돌아올 때는 반드시 흰 돛을 올리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했는데 그걸 잊어먹은 것이다.

멀리서 테세우스의 배를 보던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검은 돛을 보고는 아들이 죽었다며 절망했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이후로 이 바다를 ‘아이게우스의 바다’ 즉 ‘에게해’(Aegean Sea)로 부르는 유래가 된다.

 

참고로

크노소스 궁이 복잡한 미로의 궁이어서 미궁(labyrinthos)이라 불렀는데

여기에서 미로(labyrith)란 단어가 생겼고 의학적으로 내이(內耳)의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