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서쪽의 종석대 아래 고도 800m 정도 지점에 上禪庵이 있다
엊저녁까지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했기에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잤다
배가 고파 눈이 뜨이며 문득 오랜만에 상선암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부랴부랴 도토리 배낭을 챙겨 길을 나선다
상선암은 여러 해 전 지리산행을 하며 노고단에서 하산할 때 들렸었는데
법당 벽에 걸린 카일라스 사진이 언제나 상선암에 대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천은사의 산내암자로 나옹화상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전쟁 후 세워졌고
근래 1998년 예일대, 하버드대학원을 졸업한 벽안의 구도자 현각스님이
이곳 토굴에서 100일 동안 솔잎가루와 약간의 과일만 먹으며 묵언수행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들머리.
오랜만에 오다보니 산길 초입이 헷갈린다
스마트폰 지형도를 보고 금새 찾아내지만
케른(cairn)이 제대로 길을 찾아 들었음을 알려준다.
산사면 응달.
사람이 많이 찾지 않아 산길이 아슴프레 한데 응달쪽에 눈이 제법 쌓여 더 헷갈리게 한다
그래도 지리산행 경력 30년에 길눈은 터였으니 이 정도야~~
괴괴한 산 속에 어쩌다 산 전체가 '꽝'하고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곤 한다
덩치 큰 나무의 줄기가 툭 부러지며 내는 굉음이다
돌탑.
나같은 비불교인한테는 그냥 케른일테지만 불교인에게는 당연 돌탑일 것이다
이 또한 참선 수행의 일부로 쌓은 것이겠지.
지청구.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을 이런 곳에 데려왔다고 잔소리를 좀 듣지만
뭐 좀 못 들은 척하기도 하고 위험 구간에서는 곁에서 바짝 끼고 걷기도 한다.
한걸음 한걸음 걷다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허공에 매달린 듯 하던 상선암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스님이 법당에서 나오는 게 멀찍이 보였는데
암자 앞마당에 올라서니 두리번 거려도 스님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외부인 접촉을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동안거, 하안거 중에는 외부인과 대화를 꺼리기에 더 그런 경향이 있다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되돌아 가서야....
과거 지리산행 중 토굴을 만나면 어떻게 하든 꼭 토굴 안으로 들어가 차를 한잔 얻어 마셨다
아무튼 오늘도 말문을 터 볼 일이다.
이곳저곳 스님을 찾아보니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떼고 있다
"스님, 법당에 들어가 절 올리고 벽에 걸린 카일라스 사진 한번 보고싶습니다"
라고 넉살스럽게 말을 건네니
"예, 그러세요"
라고 한다
곧장 바로 내집인양 문 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상선암 윗쪽에 우번대가 있는데 예부터 이 둘 모두 불도의 이름난 靈地였다
이와 관련 전설이 있는데
옛날 신라 때 젊은 스님 우번이 상선암을 찾아 10년 동안의 좌선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서 열심히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우번이 정진하던 9년째 되는 어느 봄날이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암자 앞에 홀연히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번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정답게 손짓을 했다.
유혹에 홀린 우번은 젊은 피가 끓어올라 자신이 수도승이란 것도 잊은 채 그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미모의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며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림 속을
나는 듯 가볍게 지나쳐 상봉을 향해 높은 곳으로 올라만 갔다.
우번도 놓칠세라 그 여인을 따라 숲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허겁지겁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종석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요염하게 웃으며 손짓하던 그 여인은 갑자기 사라지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위엄스레 서 있었다. 우번은 깜짝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관세음보살이 자기의 도심을 시험하기 위해 미녀로 변신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자신의 어리석음과 허튼 마음을 뉘우치고 참회했다.
우번이 다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우번은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닫고 이때부터 더욱 분발하여 수도정진하기로 결심했다.
상선암으로 다시 내려가는 대신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수도정진을 계속했다.
우번은 수 년 동안 수도를 한 끝에 마침내 성불하여 신라의 이름난 도승이 되었다 한다.
상서로움.
암자 뒤 바위와 소나무에 예사롭지 않은 기가 서린 듯하다.
사천왕수.
암자 앞마당 한켠에 우뚝 선 키 큰 나무는 분명 상선암을 수호하는 늠름한 사천왕수이다
편액,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7)의 글씨이다
법당 내부.
눈길이 우선 벽에 걸린 카일라(수미산) 사진으로 간다
카일라스를 한참 주시한 후에야 부처님 전에 머리를 조아린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 믿음이야 있든없든 절에 왔으니 절을 올리는 것이다
줏대 없는 남자의 소신이다
절하며 소원을 빌었다
딱 한 가지만 들어주십사 하고......
카일라스.
카일라스는 티벳에 있는 산으로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의 성지이다
이 산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을 `코라`라고 하는데 티벳인들은 이를 아주 신성히 여겨 오체투지로 돈다
난 올여름 걸어서 한번 돌아볼 계획인데 오랜 전부터 생각해왔지만 병치레 등으로 늦어졌다
5,630m의 돌마라 고개를 넘는 게 관건이라 좀 걱정은 되지만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니 한번 부딪히고 볼 일이다
해보지도 않고 미리 겁먹는 것은 사나이 체면에......
" 희상아, 8월에 같아 가자 "
茶香.
절을 올리고 법당에서 잠깐 머무작거리니 바로 옆방 스님이 주무시는 곳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찻물 끓는 소리에 차향이 코밑에 느껴지는 듯하다.
녹차.
처음에는 녹차를 주는데 다관에 담긴 찻잎이 평소 자주 보던 찻잎이 아니어서
물어보니 용정차라고 하는데 차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당연한 일이긴 하다
차맛의 90%는 물맛인데 물이 좋으니 차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보이차.
난 녹차도 마시지만 중국 운남성에서 사온 보이차도 마신다고 하니 역시 보이차도 맛보여 준다
방안에 차를 담은 봉지함이 여럿인 게 보여 분명 보이차도 있음을 감으로 알 수 있어 청한 것이다
그런데 보이차 맛이 내가 현재 먹는 것보다 더 부드럽고 상품인 것 같아 출처를 물어 구입처를 확인한다.
하산길.
참선하는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차가 정신을 맑게 하기 때문이다(茶禪一味)
차를 마신 후 아내의 기분도 좀 풀렸는지 투덜거리지 않고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차를 꽤 마시기도 했고 차의 이뇨작용 때문인지 방광이 부풀 대로 부풀어져 있다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고 오줌은 늘 멀리 싸고 싶은 게 남자이다
오늘따라 방뇨하는 오줌발이 멀리도 뻗어 낙하지점이 십리는 되는 듯하다
지리산 氣를 받았음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