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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0 그리스3<에피다브로스,미케네>

서영도 2022. 6. 10. 15:01

 

★ 에피다브로스

 

 

 

♣ 에피다브로스 고대극장(Ancient Theatre of Epidaurus)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의 항구도시 에피다브로스에서 8km 내륙에 위치해 있고

1988년 <에피다브로스 고고학 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폴론의 아들이자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쳐진 극장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료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극장은 기원전 4세기 폴리클레이토스에 의해 건축되었고 최초 34단으로 만들어졌지만

로마 시대에 21단이 추가되어 1만4천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정면에서 낭독하는 목소리가 음향기기의 증폭 없이 객석 맨뒤까지 들릴 정도로 음향효과가 완벽한 수준이다

고대 그리스 극장 중에 음향적으로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최고의 극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매년 여름 정기적으로 연극, 오페라 등 각종 공연이 열리고 있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출생지가 에피다브로스이다

극장은 음악, 연극 공연뿐만 아니라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경배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음악, 연극 공연의 관람이 환자의 정신적, 육체적 치료 효능에 있다고 믿었기에 극장은 당연히 필요했었다

 

최초의 근대 공연은 1938년 고대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중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엘렉트라(Electra)`였다

이후 2차 세계대전으로 공연이 중단되었지만 1954년 재개되어 현재까지 매년 여름철에 아테네 페스티벌과 함께

에피다브로스 페스티벌이 열려 수많은 관광객과 연극 애호가들이 이곳을 찾아

거의 2500년 전에 쓰여진 고대극의 현대 공연을 관람한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의 3인이다

 

 

에피다우로스 페스티벌

 

 

유적지마다 그리스 학생들이 현장학습 차 선생님의 인솔하에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려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그리스인의 자부심을 느끼며

현재 그리스가 처한 경제적 난관을 하루빨리 회복하기 위한 의지를 고양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현장교육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맨앞줄 로얄석은 등받이 달린 의자였다

 

극장이 발견되기 전 이곳은 6세기에 일어난 지진으로 깊은 흙더미 속에 갇혀버렸고

완만하게 굴곡진 언덕, 곡식이 자라는 들판, 올리브나무 과수원 등으로 바뀌어

이전에 큰 극장이 있던 자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2세기 이곳을 방문하고 " 로마의 극장들은 더 거대하고 웅장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균형미에서

에피다브로스의 극장과 견줄만한 건축물은 없다 "라고 쓴 파우사니아스의 글을 읽은

19세기 그리스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파나기스 카바디아스는 이곳의 언덕들에

비밀이 고이 간직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1881년 에피다브로스 극장이 발견된 것은 고고학적, 건축학적으로 의미있는 발굴이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고대 극장들이 일부분이 파손된 것이거나 복원된 것들인 반면에, 

에피다우로스 극장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높이 6미터가 넘는 흙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지만 때론 드물게 이렇게 보존하는 역활도 한다.

 

오케스트라  중안의 이곳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소리, 종이를 찢는 소리조차 객석 맨뒤까지 들릴 정도이니

음향효과는 최고임에 틀림없다

 

그처럼 훌륭한 음향 효과가 나는 것은 에피다브로스 극장이 계단식으로 된 반원형이고,

층층으로 된 좌석의 경사가 급하게 되어 있어, 무대에서부터 객석 맨뒤까지의 거리를 좁혀 주어

음파가 거의 약화되지 않은 채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좌석 줄 간에 적절한 거리를 둔 것이 훌륭한 음향 효과를 내는 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이다. 

그로 인해 소리는 어디에서나 똑같이 크고 맑게 울려 퍼진다. 

그 외의 다른 요인들 중에는, 소리가 오케스트라와 층층으로 된 좌석의 굳고 단단한 표면에 부딪쳐 반향을 

일으킨다는 점, 양질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는 점, 지형 지세에 잡음을 낼 만한 것이 없다는 점,

오케스트라 쪽에서 객석 쪽으로 산들바람이 계속 불어온다는 점 등이 있다.

최근 미국의 음향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에피다브로스의 탁월한 음향효과가 석회암이 저주파를 흡수해

소음을 여과하고 고주파를 반사시켜 반향을 증폭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아스클레페이온(Asclepieion,Sanctuary of Asclepios)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과 의사의 대명사를 넘어 의술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이런 환경에 힘입어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하며 의술을 펼치던 사람들이 

에피다브로스에 치료 병동과 휴양시설을 갖춘 의료 센터를 건립하게 되었다. 

아스클레피에이온은 종합 의료센터 기능을 했다

아스클레페이온(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축복받은 의료의 중심지로

많은 병자들이 치유 기도를 위해 모였다.

 

올바른 치료를 찾는 환자들은 큰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꿈속에 신이 나타난 환자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명했던 아스클레페이온은 세 곳에 있었다. 

에피다브로스스 외 히포크라테스가 태어나 의술을 펼쳤던 코스 섬, 소아시아 지역의 페르가몬의 세 곳이

 

 

 

♣ 에피다브로스 박물관

 

 

당시 수술에 사용되었던 기구,

좌상부는 부인과질환에 이용되는 질경

 

초기에는 정신적 치료를 강조하면서 약초와 기도만으로 환자를 치료했지만, 

후기에는 외과 수술도 했다. 

 

아테네 여신(우측),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

 

옷주름의 묘사가 아주 섬세하다

 

아스클레피오스 성역

 

스타디움

환자 치료를 위해 공연을 위한 극장도 필요했지만 체력단련도 중요했다

 

병원터.

에피다브로스의 아스클레피오스 병원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 번성했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최고로 번성했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부터 그리스의 신앙을 이단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426년에 테오도시우스(Theodosius)이 그리스 신앙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비롯한 이곳의 많은 신전은 폐쇄되고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후 522년과 551년에 지진이 발생하면서 그마나 남았던 건축물 잔해마저 대부분 소실되었다

 

에피다브로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부상자를 치료하던 곳으로 유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폴리스 연합인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이다.

25년에 걸친 이 전쟁에서는 스파르타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며

그리스 폴리스 국가 전체의 세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 틈을 노린 북방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2세(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는 그리스를 쉽게 통일할 수 있었다.

 

 

환자들이 신전을 방문하면 사제들은 먼저 그들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목욕을 마친 환자들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신전에 들어가 마음에 안정을 취하며 잠을 잤다. 

잠을 자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에서 신을 만났고, 환자에게는 사제가 

그 꿈을 신의 계시라고 말한 뒤, 꿈의 해석을 통해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내렸다. 

환자들은 사제의 치료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사제의 치료는 인간적 판단이 아니라 꿈을 통해 내려진 신의 명령에 근거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믿음은 사제들의 의술에 효과를 배가시켰다. 

환자들은 신전의 규율에 따라 엄격한 식사를 했고. 시간을 정해 운동을 했고, 

극장에 가서 비극과 희극을 관람했으며 노래와 악기연주를 감상했다. 

이 모든 치료 프로그램의 운영은 축제처럼 진행되었고, 이를 위해 신전 주변에는 목욕탕과 식당, 숙소, 

그리고 운동을 위한 체육관과 스타디움, 공연을 위한 극장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병원은 그야말로 ‘힐링 프로그램’을 위한 문화적 의료복합단지였다.

 

치료하는 모습의 부조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이 테살리아의 공주 코로니스Koronis와 결합하여 낳은 자식이다

그는 켄타로우스 케이론에게 의술을 배워 산 자는 물론 죽은 자까지 살려낼 정도로 뛰어난 의사였다

그러다 보니 지상에서 죽은 자들의 수는 자꾸 줄어들었다

결국 지하의 신, 하데스가 불평을 하고 제우스가 이 신적인 의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자연과 우주의 질서와 법칙을 어기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산 자의 목숨을 연장하고 죽은 자까지 불러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죽었다

하지만 제우스는 인간들의 삶에 큰 도움을 주었던 아스클레피오스의 업적을 기려

하늘로 올려 별자리, 뱀주인자리(땅꾼자리, the Serpent Holder, Ophiochus)가 되게 하였다

 

아폴론은 아들 아스클레피오스의 죽음에 분노하였지만 냉정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 제우스에게 직접 대항하지 않고 제우스가 매우 아끼는 천둥, 벼락, 번개의 삼총사

퀴클로페스Kyklopes를 타르타로스로 보낸다

제우스는 최고신으로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아폴론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폴론은 인간 세상에 내려와 아드메토스 왕의 집에서 목자 노릇을 하는 벌을 받는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후대에 다시 살아나 신이 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태어난 도시인 에피다브로스가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곳,

즉 병원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다

 

5월말 그리스 남부의 햇살은 뜨겁기가 작열하는 불길과 진배없다

뜨거운 햇살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스클레페이온 유적의 석축에 걸터앉아 몸을 비스듬히 뉘운 채

잠든 여인은 꿈 속에서 아스클레피오스를 만나 다시 건강해질 수 있는 계시라도 받으려는 것일까

 

 

 

미케네(Mycenae)

 

호메로스가 `금빛 찬란한 도시`라고 일컬었던 미케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이 다스리던 곳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쪽, 아르고스 평야 북쪽의 교통요지에 자리하고 있어

기원전 16세기 ~ 12세기 청동기 시대 미케네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케네 문명의 중심 도시로서 티린스와 함께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래 동안 신화 속 이야기로만 여겨졌던 트로이와 미케네 이야기는 독일의 상인이자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lich Schlieman, 1,822~1.890)의 발굴로 역사가 되었다

 

 

♣ 아트레우스 보고(Treasury of Atreus)

 

미케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기 500m 전 좌측 언덕에 위치했다

1879년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발굴 당시 아트레우스 가문의 보물 창고일 것이라고 생각해

`아트레우스 보고`라고 명명했지만 실제는 주검을 호화롭게 장식하기 위해 지어진 분묘이다

미케네의 전설적 왕 아트레우스의 이름을 따서 지었지만 실제 누구의 묘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드로모스(dromos)

입구로부터 유골이 안치된 현실(玄室)로 연결되는 통로9羨道)를 드로모스라 하는데 길이 30m이다

 

아트레스는 트로이 전쟁 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아버지이다

 

상인방

문입구 위쪽에 가로질러 놓여 하중을 받쳐주는 구조물을 상인방(上引防)이라 하는데

그 무게가 자그마치 120톤으로 8.3 × 5.5 × 1.2m 인데 상인방으로서는 세계 최고이다

상인방 상부의 삼각형 형태의 빈 공간은 상인방의 하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게를 양옆으로 분산시키는 릴리빙아치(relieving arch)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톨로스tholos(蜂巢)식으로 높이 13.5m, 직경 14.5m이다

톨로스식 무덤은 그리스에서 9개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이 제일 크다

 

포석(鋪石)을 차곡차곡 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지름이 좁아지는 동심원(同心圓) 형태로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지붕이 굳건하게 서로 밀치고 버티는 벽돌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바닥에서부터 천정까지 무려 33단으로  고난도의 돔(dome) 공법이 사용된 그리스 최초의 건물인 셈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선두주자는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tion)이다. 

지중해 한 복판의 섬 크레타에서 BC 3,650년부터 BC 1,170년경 까지 융성했는데 

크레타 문명을 전수받아 그리스 본토로 본격적으로 이식(移植)한 주체는 미케네 인들이다.

이들이 일군 그리스 본토 최초의 문명이 미케네 문명(the Mycenaean civilization)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동부 지역에 위치한 미케네 왕국은 BC 2000년경부터 BC 1200년경까지 융성했다

 

미케네 성채

아트레우스 보고 앞쪽으로 미케네 성채가 바라보이는데 길을 건너 500m 정도 이동하면 된다

 

 

미케네 성채의 축소모형

 

 

성벽(cyclopean wall)

성벽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Cyclops)가 쌓았다고 전해질 만큼 커다란 돌로 쌓았다

 

사자문(Lion Gate)

상인방 위 삼각박공에 사자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자문이라 부른다

 

사자 2마리가 앞발을 제단 위에 올리고 머리로 기둥을 받치는 모습이다

사자는 권력과 방어를 상징하는 주술적 의미가 있고,

기둥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의 기둥을 빼닮았다.

기둥 위의 벽체를 장식한 동그라미 문양까지 그대로 닮았다.

그리스 고대 건축에서 대부분의 기둥들이 밑둥이 더 굵거나, 중간을 더 굵게 만드는 엔타시스(entasis) 양식인데 반해,

이 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굵어지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크레타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미케네 문명이 1600년 이상 먼저 부흥했던 크레타 문명 양식을 그대로 전수받았다는 증거다

 

 

사자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미케네 궁성이다

그런데 이 사자문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이가 있었으니 불행한 예언자 카산드라이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었다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았으나 아폴론의 사랑을 거부한 죄로 예언의 설득력은 얻지 못해

아무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트로이가 멸망할 것라는 신의 계시를 전해도 아무도 들으려하지도 않고 믿지 않았다

 

트로이가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하여 화염에 휩싸였을 때 카산드라는 신전으로 도망가서

팔라디온 아테나 여신 성상에 매달린다

그리스 장수 아이아스가 신전까지 쫒아와 아테나 제단에서 그녀를 욕보였다

아테나 여신은 그리스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도 아이아스를 벌하지 않자 그리스 함대가 그리스로 회항할 때

아가멤논의 배를 제외하고 모두 난파당하게 했다

이로 인해 오디세우스는 10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갖은 고생을 했던 것이다

 

패전국의 공주로 아가멤논과 함께 미케네로 온 카산드라는 이 사자문 앞에서 왕가의 피비린내를 알아차리고

들어가기를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되고 결국 아가멤논의 아내에게 피살당했다.

 

 

 

 

원형무덤(Grave Circle A)

 

성문을 들어서 조금 가면 우측으로 원형의 무덤이 나온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1876년 이곳을 발굴하고 아가멤논의 무덤이라고 믿었던

아가멤논 황금 가면을 비롯한 무수한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이 무덤은 그 후 조사에 의해 사자문과 함께 기원전 135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은 기원전 1200년대의 인물이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미케네를 황금이 흘러넘치는 도시라고 했는데 실제로 아가멤논의 황금가면 등

수많은 황금 유물이 발견되며 미케네가 부와 강력한 왕권을 가진 힘의 도시였음을 말해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대서사시이다

트로이를 `일리오스` 또는 `일리온`이라 부르는데 『일리아스』는 `일리오스`의 노래란 의미이다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50년 경 벌어진 전쟁으로 미케네 문명의 주역인 아카이오이인들과

트로이인들 사이의 전쟁으로 10년 동안 이어졌다.

트로이는 흑해로 들어가는 헬레스폰트 해협의 길목에 있었다. 지금은 터키 땅에 속한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흑해로 통행하는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려던 그리스인들과

이를 통제하려던 트로이인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벌어졌지만,

전쟁의 명분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납치해 간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되찾아 오고 트로이를 응징하는 것이었다

 

전쟁 이야기는 당시 문자가 없었기에 이후 500년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내려왔다

트로이 전쟁이 발생하고  500년 후인 기원전 750년경에 이르러 호메로스는 이 구전을 토대로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를 지었다

일리아스드 속에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해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라고도 했지만

그가 『일리아스』 속에서 언급한 미케네 왕국의 실체가 발견된 것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일리아스`의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었고

그는 트로이 전쟁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다

성인이 된 후 그는 사업의 성공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후 그 자금을 바탕으로 유적 발굴에 나섰고

트로이와 함께 미케네를 발견함으로써 기원전 1600~1200년 청동기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미케네 왕국이

단순히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닌 역사 속의 왕국이 되었고 트로이 또한 역사 속의 도시가 되었다

 

 

 

당시 메케네는 강국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원정군을 구성한 그리스 왕국들의 선박 수를 나열한 함선표가 있는데

이 표를 보면 당시 각국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다

미케네의 출정 선박 수는 180척으로 최대이다, 다른 왕국은 아무리 많아도 90척을 넘지 못한다

그러니까 미케네는 다른 왕국들보다 배 이상 강력한 국력을 지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아이스퀼로스는 아트레스ㅡ아가멤논ㅡ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이 가문의 피비린내를 소재로

대표작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남겼으니

『아가멤논(Agamemnon)』, 『제주를 붓는 여인들(Choephoroi)』,『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이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가멤논을 그의 부인 클뤼타임네스트라Klytaimnestra가

살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를 붓는 여인들』은

아가멤논의 자식들인 엘렉트라Electra와 오레스테스Orestes가  성장하여

아가멤논의 무덤에서 재회하고 아버지의 복수를 모의한 후 궁전으로 들어가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하는 이야기이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오레스테스가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뉘에스Erinyes에게 쫒기다가

델포이 신전에서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로 가서 아테네 여신이 주재하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복수의 여신들이 자비의 여신으로 변모된다는 이야기이다

 

 

아가멤논이 부인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살해된 목욕탕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트로이와의 전쟁을 위한 그리스의 준비는 갖추어졌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177개의 도시에서 10만의 군사, 1,186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정을 하려했지만

아울리스 항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함선이 떠날 수 있게 순풍이 불어주지 않았다

예언자 칼카스는 아르테미스가 분노하여 아가멤논의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이는 과거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사슴을 죽이고 자신과 아르테미스를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은 갈등하였지만 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뒷세우스는 두 모녀를 속일 생각으로 미케네로 갔고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딸 이피게네이아가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결혼할 것이니 얼른 항구로 데려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비정한 아버지 아가멤논은 딸을 잔인하게 다룬 후 새끼 양처럼 제단 위에 올린다

그러나 이피게네이아는 제단 위에서 칼에 맞아 죽기 직전 아르테미스에 의해 빼돌려지고 대신 암사슴이 희생된다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에 의해 타우리케로 보내져 이방인들 속에 여사제로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희생 제의에 참여했던 그리스인들은 모두 이피게네이아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어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딸의 죽음을 가슴속에 묻고 아가멤논이 전쟁에서 돌아오기를 10년을 하루같이 기다렸다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에 대해 아가멤논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정부가 숨어있는 목욕탕으로

유인 후 도끼로 내려쳤다

 

 


♣ 미케네 박물관

 

아가멤논의 황금가면

진품은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이것은 복제품인데 그리스 마지막날 진품을 보게 될 것이다

 

아가멤논 집안의 저주는 할아버지 펠롭스, 아버지 아트레우스, 아가멤논으로 대를 이어 이어지는 신의 저주인 것이다

 

펠롭스는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펠레폰네소스로 이주한 후 피사의 왕 오이노마오스의 딸 히포다메이아에게 청혼한다

오이노마오스는 자신의 딸과 결혼한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란 신탁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의 딸과 결혼하려는 구혼자들과 전차경기를 하여 모두 죽여버린다

그렇지만 펠롭스를 사랑하게 된 히포다메이아는 마부 뮈르틸로스를 설득해 아버지의 마차 바퀴축의 핀을 뽑게 하였다

펠롭스는 그 대가로 왕국의 절반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오이노마오스 왕에게 승리한 펠롭스는 대가를 지불하기는커녕 마부를 죽인다

헤르메스 신의 아들이었던 마부 뮈르틸로스의 죽음은 펠롭스와 그 가문의 저주를 불러일으켰다

 

아트레우스는

펠롭스와 히포다메이아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서 동생은 튀에스테스이다

펠롭스 사후 아트레우스와 튀에스테스는 왕권을 두고 서로 다투는데 결국 아트레우스가 왕이 된다

아트레우스에게는 아에로페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불행히도 그녀는 시동생 튀에스테스를 사랑했다

아트레우스는 아내가 튀에스테스와 간통한 사실을 알고 잔혹한 방법으로 복수한다

성대한 잔치를 열고 튀에스테스의 아들을 죽여 요리하여 아버지에게 먹이는 만행을 벌인다

튀에스테스는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권력도 없고 대신 복수할 자식도 모두 죽었다

다만 근친상간을 통해 낳은 아이기스토스가 남아 있었다

아이기스토스는 트로이 전쟁 중에 그리스에 남아 복수를 준비했다

그는 아가멤논의 부인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정부가 되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해 금의환향한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문어 문양의 도기

유사한 문양의 도기들이 크레타 고고학박물관에 다수 있는데

이는 미케네 문명보다 훨씬 앞섰던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의 영향이다

 

독수리 머리 모양의 장식품

 

Europa호텔

전원호텔로서 번화한 대도시의 5성급 호텔은 아니지만 지친 몸을 하룻밤 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새벽 일찍부터 귀를 간질듯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김은 최상의 모닝콜이었으니.....